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로봇 이야기는 슬프다. 아니 무섭거나 슬프거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은 AF(Artificial Friend) 클라라의 이야기다. 조시(인간 소녀)가 쇼윈도 속의 클라라와 약속을 하고 클라라는 조시를 기다릴 때부터 이 소설은 슬플 것이라고 예상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A.I.>(2001)가 떠올랐다. 어린 소년 로봇이 하염없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클라라와 태양>과 닮았다. 주인공 로봇이 아이라는 점, 주인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은 독자를 가슴을 아련하게 만든다.
변치 않는 사랑은 슬픈 법이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란 없는 법인데 로봇에게 입력된 값은 변치 않고 영원하니까 로봇은 슬픈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인간은 늘 다음 버전을 찾고 신상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함께한 로봇은 그 자리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래서 휴대폰을 바꾸거나 차를 바꿀 때 지금까지 나와 함께해준 그 기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랑은 상호관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양쪽이 모두 변치 않거나, 한쪽만 변하거나, 둘 다 변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양쪽 모두 변하지 않는 사랑은 아름답지만 재미없다. 그래서 이야기로서 매력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대단하니까 박수는 쳐주지만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둘 다 변하는 사랑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사랑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고 방법이 바뀔 수도 있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가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이야기라면 <올드보이>(2003)는 방법이 바뀌는 이야기다.
한쪽만 변하는 사랑은 대부분 슬픈 이야기다. 그래도 양쪽 모두 인간이라면 변치 않은 쪽이 슬퍼하더라도 그 끝이 있지만 그게 로봇이라면 그 슬픔은 끝이 없어진다.
일반적으로 로봇은 감정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감정이 있더라도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결과이니 가치가 덜하다고 여긴다. 그래야만 하는 것 같다. 왜냐면 인간이 로봇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점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실망, 희망, 슬픔, 간절함, 희생이라는 것을 분명 갖고 있다. 그것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감정이 ‘표출’되는 행동으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클라라는 조시가 아닌 다른 아이가 자신을 데려가길 원치 않고, 조시가 병에서 낫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으며, 조시를 위해 풀숲을 헤치고 헛간으로 태양에게 소원을 빌러 간다. 심지어 소중한 자신 내부의 용액까지 소비한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다른 점은 오히려 우리가 말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에서 더 명확하게 증명된다. 인간은 누군가를 배신하고(로봇은 배신하지 않는다), 비합리적이고(로봇은 합리적이다), 폭력적이다(로봇은 주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다. 로봇에게 감정을 프로그래밍하더라도 해를 끼치지 않을 감정인 슬픔, 간절함, 실망, 희생 같은 것들만 넣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감정인 분노, 기만, 억지 같은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이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때, 우리는 주변 사람에게 인간다움을 요구하고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라고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감정만 느끼길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로봇 다움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완벽하지 않은 존재가 내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 그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사랑이 소설처럼 가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인간답기를 바라는가, 로봇답기를 바라는가?
PS 클라라의 모습을 상상할 때 자꾸만 <오징어 게임>의 ‘영희’가 떠올랐다. 노란 상의에 오렌지색 멜빵 원피스. 아마도 책 표지 색깔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자꾸 영희가 눈동자를 돌리며 사람들을 죽이던 모습이 겹쳐서 초반에 감정이입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