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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Nov 21. 2022

내 삶을 가공할 권리의 범위는?

경험을 재료 삼아 글쓰는 사람들의 고민



"<빈 장롱>은 비평가들에게는 소설로 읽히고 독자들에게는 자전적 소설처럼 읽힐 겁니다. 물론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소설로 읽지 않았죠. 당시 나와 함께 살았던 내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내가 어머니에게 가한 그 폭력 앞에서,어머니는 아주 지혜롭게 그러나 또한 아주 순응적인 태도로 연기를 하셨어요. 모든 게 지어낸 허구인 양 행동하시더군요. 하지만 틀림없이 내 책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셨을 거예요."

- <칼 같은 글 쓰기> 중


1.

<빈 장롱>(혹은 빈 옷장)은 아니 에르노의 스무 살 무렵 낙태의 경험(자궁이 있는 자들의 불행이여!), 그리고 그 이전의 부모와의 관계, 부르주아 남성에게 버림받았던 경험 등이 빼곡히 적혀있는 소설(!)이다. 읽고 있으면 마치 내 자궁이 아픈 것 같은 느낌, 윗배가 울렁거리는 느낌이 날 정도로 자기를 철처하게 파헤쳐 묘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내게는...


2.

어제도 오늘도, 지금도 계속 나는 나의 이야기를 가공해서 쓰고 있다. 대화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 또 당시에 떠올렸던 상상들까지 오롯이 뚝 떠와서 거기에 '다른 등장인물을 만들어내고 장소를 바꾸는 권리를 나 자신에게 주저 없이 부여'(<칼 같은 글쓰기> 중)하고 있다.



3.

이미 나는 내 책 때문에 딸하고 대판 한 바탕, 아니 두 바탕 했다. 왜 자기 이야기를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썼냐는 것이다. 그 결과, 이번에 쓰는 작업엔 딸의 자리에 대신 다른 아들이 들어간다. 여기에서 여성 3대로 내려오는 스토리의 엣지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할 수 없다. 딸이랑 약속했으니까.

사실 내가 별 생각없이 딸과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누가 내 책을 읽어?' 하루에 코로나 확진자가 만 명이 넘게 쏟아지는 이 인구 중에 누가 내 책을, 얼마나 내 책을 읽겠냐는 심산이었다.


이 책은 뒤늦게 걸리는(?) 바람에 정말 곤란했던 책이다. ㅠ



이 책은 하마터면 세상에 못 나올 뻔한 책이기도 하다. 딸과 굳게 약속을 하고 출간한 책이다.


그래도 딸이 격렬하게 항의를 하니, 그 선은 지켜주어야 한다. 다른 이들도 도대체 어디까지 이 이야기를, 이 등장인물들을 지켜줘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한 15년 전인가, 그때는 내가 전혀 글을 쓸지도 몰랐는데 친한 동생이 그랬다.

- 언니는 만약 소설가가 되면 가명을 써. 언니 인생은 너무 ... 좀 그래. 드러내기가...

- 나는 그래서 가명을 쓸 거야. '황패티'로...

- 안 돼. 언니는 황 씨라는 성부터도 딱 언니 같아. 안 돼.


아니, 황패티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나를 유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이 동생은 지금 내가 쓰는 이야기의 큰 축을 담당하는 캐릭터로 가공됐다. 이 친구는 과연 저 멀리서 내 이야기를 볼까? 그럼 어떤 생각이 들까? 무서울까? 설마, 내 글을 볼까? 하는 생각이 더 크다. 아직까지는....


4.

이미 <시나리오 쓰고 있네>에 '작은 옹녀'로 등극한 우리 엄마는 책이 나온 뒤, 정확히 저 아니 에르노의 엄마처럼 반응했다. 모든 것이 허구인 양. 그래서 그 에세이는 엄마 친구들에게는 단 한 권도 돌려지지 않았다. 아니, 나의 모든 에세이를 엄마 친구들은 한 줄도 읽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혼녀' 딸이 있는 건 너무 창피한 일이거든. 대신 조용하게 이 한마디 했다.

- 앞으로 엄마 얘기는 좀... 이제 그만 써라....



5.

여하튼, 안 쓸 수가 없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은 세포 하나하나에 엄마에 대한 증오와 사랑(좀 다른 종류의 괴랄한 사랑임을 얼마 전에 알았다)과 갈급이 촘촘히 박혀 있는데 어떻게 안 쓰냐. 그걸 안 풀고 어떻게 새술을 부대에 담을 수 있나.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

- <단순한 열정> 중


6.

나는 이 구절(책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이다)을 읽고 정말 미친듯이 깔깔대고 웃었다. 물론 혼자 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라고 정확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또,또,또 확인했던 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자기 아내에게 들킬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내 책까지 당신 와이프가 다 찾겠냐고 반박했지만 막무가내. 아내를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했던 사람이다. 즉, 나와 사랑할 자격이 없었던 자였던 것이다.


7.

그리고 또 하나.

아니 에르노라는 탁월한 소설가의 '뻔뻔함'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끝까지 호기롭게 쓸 수 있었겠지만... 무슨 나에게로 온 단어를 글로 표현햐. ㅋㅋㅋ 그냥 책 초반 보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쓰고 싶어 안달이 나고, 이렇게 쓰지 않으면 마음도 진정이 안 됐을 것이고, 폭풍우가 치던데. 아주.... 그런데 이렇게 멋있는 표현으로 에둘러치다니 멋있다.


8.

이번 작업하면서 참 이상했던 것이 예전에는 어떤 스토리를 쓰든 저 말(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을 했던 사람의 에피소드를 꼭 집어 넣었었는데 이번에는 이미 마음이 짜게 다 식은 후, 막이 다 내리고 철거까지 끝이 났는지 단 한 씬도 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9.

주변 사람들, 거의 대부분 지나간 사람들이지만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나도 이야기들을 가공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권리를 늘 상기하면서 글을 쓴다. 자꾸 움추러들어서....)

특히 엄마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왜 집요하게 천착해서 쓸 생각을 못 했나 싶다. 이 가공할만한(가공할.과 뜻이 다르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남자의 자리>나 <한 여자>와 같은 아니 에르노의 작업이 그래서 더 의미있게 느껴진다. 애정과 애처로움을 담은 사모곡, 사부곡이 아니다. 오로지 이 작업을 통해 '살려는 것' 같이 보였다. (<한 여자>만 일부 읽고, 남자의 자리는 아직 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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