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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Dec 15. 2022

황섬, 드라마 정글북

오늘은 마음이 급합니다. 아마 내일은 더 급할 거예요. 모레는... 

지난 번 제출한 기획서가 한 마흔 장 가까이 되었는데, 완전 까였거든. 왜 그랬는지는 너무 알겠다. 성의도 없이 그냥 '초고'를 낸 거나 다름없었다. 정말 내가 왜 그랬나, 정신이 나갔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문장들 범벅이었다. 그걸 읽고 있었을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하지만 내게는, 그 기획서 없으면 이제는 안되겠다. 

나만 알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이 모두, 창피한데,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와, 오늘 기억 못 할 일마저도 그 기획서 보면 다 들어가 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곳에 떡 하니 들어가 있어서 너무 귀엽고 웃기다. 그걸 쓸 당시에는 내가 (약간은 미쳤지만) 다른 방향으로 버닝을 했구나.


우리 동네 도서관은 완전 우리집 같다. 


지금 기획안, 각 화별 줄거리를 잡는 데에만 거의 3개월 다 된 것 같다. 지난 3-4년 동안 드라마 쓰겠다고, 혹은 내 오리지날 작품을 쓰겠다고 언저리를 계속 돌면서도 그 내핵을 돌파하지 못했던 까닭을 정확하게 알았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자서전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글쓴이와 주인공이 완전하게 분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창피한 일이 수두룩하게 벌어질 것이다. 일단 쓴 사람이 몹시 낯뜨겁고, 보는 사람은 "그래서 뭘 얘기하겠다는 거야?" 이 소리가 바로 발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자꾸 작가랑 주인공을 같은 인간으로 놓고 쓰니 계속 넘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넘어지면서 수 년이 흘렀다. 지나고 보니 응당 거쳐야 했을 기간이다. 몇 개월 쓰다가 "아, 나 감잡았어!" 이게 쉽게 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 조금 '아 이제는 어디쯤 가면 넘어질 것 같아.' 하고 알게 되었다. (또 모른다. 한 일 년 지나고 나서 아아, 2022년 12월 15일의 황섬은 진심으로 애송이었구나! 하고 느낄지...)


그리고 좋은 스토리텔러가 나 말고 한 사람 이상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내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바를 정확하게 캐치할 줄 알아야 하고, 방향성도 같은 쪽이어야 한다. 나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사람과 작업 백날 해봤자 결코 이야기 쌓아갈 수 없다. 사람인지라, 기본적으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내게 10을 협조하라고 하면 그 반, 반의 반도 협조할 여력과 에너지를 갖추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 또한 중요한데... 말할까 말까 하다가 말씀을 드려본다. 내가 머리 돌아가는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돌아가는 사람이면 금상첨화다. 
나는 너무 빨리 돌아가는데, 옆의 조력자가 "아부지~ 돌 굴러가유~" 하고 있으면 속 터져서 그 팀은 급속히 파괴될 것이다. 혹은 조력자는 지금 다람쥐 뛰듯 튀어서 앞으로 가는데, 쓰는 사람이 머엉~ 하며 허공만 바라보고 있어도 같은 짝이 난다. 

나는 오늘도 새까만 우주를 무중력 상태에서 뱅글뱅글 돈 것 같은 느낌이다. 올해 안으로 화별 줄거리는 끝내야 한다는 (나 혼자만의 마감으로 인한) 압박감이 있는데, 뒤로 가면 갈수록 재미와 긴장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진도를 죽죽 뺄 수 없었다. 중간에 참고할만한 책도 잔뜩 쌓아놨지만, 마음이 급하니까 제대로 찬찬히 짚어 읽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돌아가는 스토리들을 이렇게 먼저 그래프로 그려서 시작하면 화별 줄거리 잡기가 좋다. 그리고, 먼저 손글씨로 마음껏 아무 위치에라도 써서 정리한 후 다시 노트북으로 옮겨 적는다. 스크리브너가 브레인 스토밍 단계의 이런 기능을 충실하게 해준다고는 하는데, 지금의 나는 '옛날 사람'인지라 배워서 써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 이번 작품까지만 한글로 쓰기로 작정했지만, 나중에 화별 기획안 통과되면 그때가서 독하게 맘 먹고 하루 시나리오 쓰는 법 배워서 적용해보려고 한다. 물론 한글에서 내가 기존에 쓰던 매뉴얼이 있긴 한데 그냥 '요즘 사람'들에게 막연하게 뒤지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다. 이렇게 좋다는 신개념 병기들이 나왔다는데, 그걸 못 써보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나. 

오늘은 손글씨로 1화부터 10화까지 화별 줄거리,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에피소드 잡는 것을 1차로 끝냈다. 이런 기본 줄거리에 매 화별로 녹여 넣어야 할 내용들, 예를 들어서 화별로 주인공이 강의하는 내용의 골자를 구체적으로 정한다거나 주인공이 덕질하는 대상(그것이 음악이든, 음식이든, 그림이든, 혹은 김연아든, 손흥민이든 다 좋다!)이 에피소드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작업이 후반에 추가될 것이다.    


쓰다보면 자꾸 긴장이 되고, 그러다보니 노트북에서 내 손가락이 잘 뛰어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중간에 끊고 이렇게 브런치에 기록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SNS는 반응이 제깍제깍 오는지라 다른 글작업들에 비해 덜 외롭다. 그리고, 확실히 내 색깔을 내며 까불수 있다. 너무 까불면 또 잡아끌어내려야 하지만. 


요즘은 법륜스님의 반야심경을 손에 잡히는대로 펴서 읽는다. 나는 칼 융이 이야기하는 '동시성의 원칙'을 믿는다. 매 순간 나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내게 분명히 어떤 유의미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점괘 뽑듯이 아무 쪽이나 펴서 읽어보고 그 구절이 내게 보내주는 메시지를 곱씹어보곤 한다. 뭐 그렇다고 아주 길게 묵상하듯 생각해보는 것도 아니다. 


<오늘의 말씀>

수행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바른 가르침을 만나 법의 이치를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언하言下에 깨치기도 하고 3일이 될 수도 있고, 석 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3년 안에는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3년'의 의미가 뭘까. 오늘은 생각해본다. 3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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