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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Dec 26. 2022

내 초고도 쓰레기

원고를 보낸 후 피드백이 두려울 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들보다 불안치가 높다. 조물주는 내게 기억력을 국자로 떠 넣어주신 대신, 안정감을 한 스푼 덜 넣으신 듯.

드라마 기획안은 지금 한 세 번째 뒤집어라, 엎어라 하는 중이다. 그리고 지난 번 회의에서 거의 최종버전으로 방향을 잡았고, 작가인 나는 쓰기만 하면 됐다. 한 달 전의 일이다. 한 달 동안 꽤 몰두했던 것 같다. 자체 평가로는... 지금 마지막 화 때문에 다들 난리가 난 <재벌집 막내 아들>도 차마 보지 못했다. 책도 그렇고, 내것 하고 있으면 남의 것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기 싫어서라기 보다 마음이 콩밭으로 가 있기 마련이라. 영화도 구성에 꼭 필요한 것들만 열심히 봤고, 책도 많이 찾아서 읽었다. (이 독서가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오늘 아침에 완성한 화별 구성.

원래의 계획은 내가 원고를 보내면 제작사 대표님과 감독님도 내일 오후 미팅에서 피드백을 받은  2022  해를 보내면서 조촐한 우리끼리의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무리짓고, 대본으로 들어가면 아주 좋을 2023 새해의 시작일 것이다.

그러나, 대표님이 선약 있던 것을 바꿔보겠다고 하셨는데 여의치 않으셨던 모양. 단톡방에 원고는 떠나갔고, 내일 미팅은 없는 것으로. 그리고 피드백은 따로 연락을 주시겠다고 한다. , 당연히, 있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새끼 같은 원고를 떠나보낸 나는  마음이 찜찜했다. 수많은 생각이 튀어나왔다.

내가 너무 촉박하게 원고를 드린 것일까? (맞다. 내일 오후 미팅인데 오늘 오전에, 아무리 아침 일찍 드렸다 하더라도 이러면 안 된다) 왜 열일 제치고 우리 드라마 미팅을 안 하시는 걸까.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이 우리 건 말고도 2-3가지는 더 되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단톡방의 톡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대표님은 충분히 예의를 갖추어서 톡을 남겨주셨고, 리뷰는 따로 연락을 주셔서 한다고 했으며 감독님은 수고가 많았다고 격려해주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슨 더 베스트 대답을 바란다는 말인지.


조바심.

언제 리뷰가 들어올지 모르는 막막함. 그를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는 마음.

분명히 지난 미팅에서 감독님과 함께 꼼꼼하게 구성을 잡았고, 나는 거기에서 재미있는 장치 몇 가지를 더 걸어서 썼다. 그리고 캐릭터도 이제는 (내 생각에) 두루뭉술하지 않고, 명료하다. 이번 기획안 쓸 때 처음으로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업할 때 내가 쓰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거의 그 방향이 옳았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대사 쓸 때 무척 재미있다)

그런데, 다 쓰고 난 다음에 두 번 밖에 퇴고를 못하고 보내서 그것이 스스로 용납안 되는 것 같다. 에세이학교에서 수강생들 글 가르칠 때는 퇴고 최소한 5번 하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두 번 밖에 못 봤으니 든든하지 않은 것. 퇴고가 신비로운 것이 정신차리고 다시 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혹은 '왜 이렇게 미친 짓을 했을까' 하는 순간을 예외 없이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엄한 과정이다. 몇 번이고 보고, 또 보고, 다시 봐도 모자랄 과정이다.

누군가(첫 번째는 제작사, 출판사, 가장 마지막은 독자, 시청자들일 것이다)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 조바심, 불안은 글을 쓰는 평생 감당해야 할 나의 몫일까? 아니면 나중에 경지에 다다르면 이 재미있지 않은, 아니 대놓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조금은 줄어들까? 그냥 감당하라면 감당은 해보겠다. 오늘의 나처럼.


어차피 내 손에서 떠났다. 내일 만나나, 다음 어떤 때 만나나, 원고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고쳐서 보낼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건 '최선'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 된다. (그래도 마지막 결승선까지 스케이트 날을 집어 넣는 성의를 보여야 할까? 아아. 복잡하다) 크리스마스에도 고생 많이 하셨으니 오늘은 푹 쉬라는 감독님의 따뜻한 말씀처럼 나는 오늘 저녁,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 맛있는 것을 시켜서 먹은 후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

안녕.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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