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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un 14. 2023

배신 背神

소설 쓰기 강좌 숙제로 소설을 써봤습니다. 

서걱. 서걱. 

학교를 졸업한 이후 족히 10년은 계속 긴 머리로 지냈었다. 불편할 것도, 그렇다고 딱히 편할  것도 없었다. 그냥 공기층에서 숨 쉬고 살 듯 늘 머리카락은 내 목과 등을 덮고 있었다. 가방을 멜 때 가방끈에 머리가 집히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긴 머리를 고무줄로 묶고 뭉텅 잘라냈다. 귀밑 몇 센치 재던 시절, 그 시절의 단발이 되었다. 

수도복의 베일을 쓰려면 머리가 길면 안 된단다. 예전부터 왜 여자만 미사포를 쓰고, 머리카락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하는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수도원의 규칙이니 그렇게 따른다. 
 수녀원에 들어와서 맨 처음 한 일이 이렇게 머리를 자르는 일이었다. 속세와의 단절을 연습하라는 의미였을까. ‘속세’라는 단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일 텐데, 왠지 끊어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여하튼 이 또한 “끊어냅니다.” 이 한마디의 서원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한다. 머리카락을 끊어내듯. 

수련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나 같은 새내기 수녀들이 쓰는 베일은 3년여의 수련기를 마치고 ‘진짜’ 수녀가 되어 쓰는 것보다는 조금 더 단순한 보자기 같다. 난생처음 받아서 쓰는 것인데, 아침마다 이것 쓰는 것도 손에 익을 때까지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 

선생 수녀님의 안내로 방을 배정받았다. 오늘 나와 함께 들어온 입회자는 1명. 딱 봐도 신앙심이 거의 잔다르크 급으로 보인다. 완전 무장 완료한 의기양양한 눈빛이다. 반면에 나는 그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성당 말고, 수녀원이라는, 말하자면 백스테이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선배 수녀님들에게 인사드리고, 자기소개를 얼띠게 마친 뒤, 입회자 두 명을 위한 만찬이라며 식당으로 안내받아 갔다. 길게 늘어선 테이블에 감자, 당근 돌려 깎아 곁들인 돼지갈비에, 얇게 저민 무에 색색의 채소를 실같이 잘라내 돌돌 말아 싼 무쌈말이까지 준비된 것을 보니 잔치가 벌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루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집 나갔다가 돌아온 막내아들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연 아버지 이야기, ‘돌아온 탕아’ 비유도 갑자기 떠오르고. 

식사를 마치고, 당번 수녀님들만 부엌에 남고 나와 다른 수녀님들은 모두 공동방에 모였다. 오후 8시부터 시작되는 수도원 대침묵 전에 하루 마무리 기도를 하고, 내일 해야 할 일에 관한 공지 사항을 선생 수녀님께 전달받는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함께 수련받는 같은 축, 지원기 수녀님들을 만난다. 총 8명. 예전에는 한 기수에 스무 명도, 서른 명도 넘어갔다는데 이제는 젊은이들이 아무래도 수도 성소에는 그다지 뜻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왜 그렇게 수녀원에 홀리듯이 오고 싶었을까. 

수녀원, 수도원의 사람들은 동료들을 식구에 비유해서 ‘함께 산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이날, 나와 함께 살 사람들을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떠올랐다. 내가 왜 그렇게 수녀원에 오고 싶었는지. 수녀가 되는 것은 둘째치고, 이 안에 발을 들여놓고 싶었다. 수녀원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보이는 건 무슨 웃음 버튼을 누른 듯 모두 온화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제발, 나도 저런 미소 한 번 얼굴에 걸쳐봤으면.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인생은 너무나 불행했다. 팔자가 나쁘다는 뜻의 불행이 아니고,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의 불행이다. 행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기어이 이 공간에 들어왔다. 

입회하기 몇 달 전, 성소 담당 수녀님을 만나려고 수녀원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수녀원은 긴 재래시장통 길을 따라 올라와야 하는데, 골목이 몇 갈래로 갈라지는 바람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중간에 조개까고 있는 아주머니가 계셔서 물어봤다. 수녀원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고. 그랬더니 조개 까던 칼을 들고 ‘저어짝’이라고 알려줬다. 고맙다는 인사로 목례를 하고 지나가는데, 아주머니는 내 등에 대고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수녀원에 가긴 왜 가요, 진짜!”

아주머니의 투박한 외침이 꼭 우리 엄마가 나한테 고함치는 것 같아 잠깐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동안 수녀원 입회 절차로 바빠 잊고 있던 그가 그리워졌다.      

우리 동네의 한 지하 주점에서 두부김치에 소주를 가운데에 놓고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던 날, 무릎을 꿇었다. 그 앞에서... 제발 그런 이야기하지 말라고. 무서웠다. 무서웠다는 감정이 맞을까. 누가 ‘워!’ 하고 탁 쳤을 때 너무 놀라서 화가 나는 느낌하고도 비슷했다. 그는. 그 전날, 아니 그날, 당일, 우리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이야기가 나올지 몰랐다. 게다가 이별을 이야기할 때 어울릴 음식들이 아니지 않나. 두부김치... 안주를 주문할 때까지도 철저하게 나를 속였다, 수도원이라니.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던 사람이 수도원이라니. 만날 때마다 빠짐없이 나랑 사랑을 나누며 몸을 포개던 사람이 수도원이라니.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해주었다. 나도 많이 했다. 그는 별을 사랑했다. 나도 사랑했다. 전국의 천문대란 천문대는 샅샅이 함께 다녔다. 고흥, 곡성, 남원, 무주... 

이런 사람에게 자기의 한 치 앞 미래도 알려주지 않고 결정을 내리다니. 적어도 고민하는 티는 냈어야지. 

나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꺾어 계속 울고 있었고, 주점에서는 김광석의 노래가 흘렀다. 

'나의 눈물이 내 뒷모습으로 가득 고여도...'

     

그가 홀연히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나서, 나의 심정은 마치 호스피스 교육받을 때 배우던 임종환자의 심리 반응 단계와도 같이 출렁였다. 이건 사실이 아닐 거야, 나 놀래주려고 그러는 걸 거야.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구나. 그래.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 정말 들어간 건가. 회사에 전화해볼까 하다가 왜 하필 그를 사랑했었는지 후회가 됐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독한 녀석을 왜 사랑한 걸까. 조금 권태로웠을 때 수도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상처가 움푹 패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하필 나란 말이지? 왜 하필 너무나 행복할 때이지?

그러다가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사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 안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아니, 이렇게 그의 행복을 비는 내가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대단해, 나는 대단해. 그리고 이 무렵에 9일 기도에 성공했다. 모두 54일, 같은 지향으로 기도했고, 지향은 모두 그의 건강과 행복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타적인 사람이었던가. 마지막 남은 초밥도 젓가락을 집어 나에게 주면 나는 마다치 않고 깔끔히 먹어 치우던 나였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단계가 바로 오늘의 내 모습이다. 그렇다. 순전히 그와 평행선을 가고 싶어서였다.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너가 수도원을 갔듯이, 나도 이렇게 수녀원에 왔어.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제부터 나도 알아보려고 해.    

  

아침 시간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서원을 한 수녀님들에게는 각방이 주어지니 새벽 미사 시간 6시만 잘 맞춰서 내려오면 되지만, 수련기의 수녀들은 와글와글 공동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샤워는커녕 아침 세수도 치열한 눈치 싸움이다. 정말 다들 채신머리도 없이 수돗가로 달려간다. 우다다다다!!! 어떤 머리 좋은 수녀는 그 몇 분을 아낀다고 머리에 베일을 쓰면서 달려간다. 

나도 이 베일 쓰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짧은 머리라도 머리에 먼저 망을 써서 정돈한 뒤 베일을 쓰고, 뒷 목덜미 쪽에 똑딱단추를 눌러 고정한다. 그리고 각자 이마랑 귀가 예쁘게 나올 정도를 잘 맞춰서 쓰는 건데, 나는 영 젬병이었다. 

그렇게 아침 미사 시간에 칼같이 맞춰 내 자리에 와서 앉아 있으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평화가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어디든 치열한 생존의 레이스를 마치고 난 뒤 얻는 평강이야말로 더 꿀맛이다.   

그와 만날 때 나는 꼭 20분에서 30분씩 늦었다. 그렇게 일부러 맞춰서 늦은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일정하게 늦을 거면, 차라리 4시 약속은 암묵적으로 4시 30분으로 알고 있자며 그가 제안했다. 귀여웠다. 왜 그때 나는 미안하지 않았을까. 

그랬던 내가 매일 드리는 수녀원의 새벽 미사 시간을, 세 번 드리는 성무일도 시간을, 두 번 거치는 노동 시간을, 그리고 저녁의 대침묵 시간을 지켜내고 있다. 저녁 여덟 시 이후에는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꼭 필요한 말은 필담으로 나누었다. 조용히 주님과 만나라는 교회의 배려였다. 교회의 배려... 그리고 규칙... 이 사이에서 예외인 공간이 있었다. 바로 불 꺼진 대성당. 

그래도 입회한 지 얼마 안 된 막내니까, 하느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일과를 마치고 나면 대성당 감실 앞에 앉아 조배를 한다. 그 평온한 어둠. 그리고 침묵... 그도 이런 것들이 좋아서 수도원으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니, 이해하지 말자. 그저 온전히 이 시간을 내 것으로 껴안아야 한다. 

조금 있으니 여기저기서 훌쩍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우나? 일부러 눈을 감았다. 훌쩍이는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눈을 떠서 감실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자꾸 눈이 검은 그림자에게로 갔다. 누군가 많이 운다. 나중에는 아예 마음을 놓고 펑펑 운다. 울음은 대침묵의 예외 조항인가 보다. 나도 사람이다 보니 왜 울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안도 사람들 사는 곳이라 당연히 크고 작은 분쟁이 있겠지. 
 

며칠 뒤, 이웃 수도원에서 새신부님이 되신 수사님들이 왔다 가셨다. 그러면서 더운데 수녀님들 시원하게 드시라고 수박 여러 덩이를 선물로 남기고 가셨단다. 그날 저녁은 후식으로 당연히 수박파티였다. 마침 나도 그 주의 식사 당번 조여서 선배 수녀님을 쫓아 열심히 수박을 잘랐다. 크게 네 등분을 한 후, 손에 들어 먹기 좋게 잘라 테이블마다 한 쟁반씩 놓아두었다. 지구도, 수박도 둥글어서 문제일까. 둥근 구는 구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양을 깨끗하게 가져가기가 어려운 형상이다. 부의 분배도, 수박의 분배도... 누구는 수박의 커다랗고 통통한 가운데 도막을 먹을 것이고, 나와 같은 막내 수녀들은 알아서 수박 끝 부분을 집어 들어 설치류처럼 벅벅 긁어먹게 될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늘 그렇듯 가장 나이 드신 수녀님들부터 식당에 내려오셨다. 평생을 온화한 공간에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사신 분들... 어떤 할머니 수녀님은 영성에 방해가 된다며 오로지 주님과의 대화를 위해 식물도 키우지 않으신다 했다. 아니, 있던 식물을 화분에서 과감히 뽑아 화장실에 버리고, 화분을 씻는 것을 며칠 전에 목도하였다. 예의 그 온화한 얼굴로... 뭔가 괴이하다는 느낌마저 들었지만, 주님과의 접점을 찾기 위해 저 연세 드시고도 영성을 갈고 닦으시는 모습에 마치 나의 미래에 갈 길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된달까. 노수녀님들의 모습에서 나는 내 수도 생활의 지도를 찾고 싶었다. 

내 영혼의 지도와 같은 수녀님들이 내려와서 식사 전 기도를 위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한 수녀님이 수박 가운데 제일 큰 조각을 집으셨고, 그 조각을 집은 손을 다른 수녀님이 딱! 소리 나게 치셨다. 식사 당번 조라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멈칫! 아니,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수녀들이 얼음이 되었다. 혹시 식사 전인데 벌써 수박을 먹느냐는 뜻일까, 아니면... 설마. 두 분 모두 환갑들은 족히 넘으신, 이미 돋보기안경을 끼고 다니시는 노수녀님들이었다. 설마... 그 이유로 치신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제일 큰 걸 수녀님이 왜 먹어?”

“왜, 나라고 못 먹나요?”

“선배님들이 계시는데? 일단 그 수박 놔요, 어서!”

“손부끄럽게 왜 그러셔.”


그 이유였다. 내가 설마 했던...      

그는 수박을 무척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10개월 내내 입덧으로 고생을 했는데, 수박과 얼음 밖에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다 했다. 그의 생일은 2월, 봄이 오기 전 강추위가 마지막으로 용트림을 하는 때다. 그때도 어머님은 어디서 어떻게 수박을 용케 구해서 드셨다고 했다. 얼음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참 신기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는 수박, 하면 환장했다. 날이 더워지면 나는 수박의 과육을 육면체로 알뜰하게 썰어 플라스틱 저장 용기에 넣어 뚜껑을 딱! 딱! 소리 나게 야무지게도 닫아서 그의 자취방으로 가져갔다.

가끔 소주에도 수박을 조각내어 담가 먹는 것을 보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온통 얼굴이 수박 색깔이 되어 소주를 맹렬하게 마시는 그를 보며. 

이렇게 좋아하는 수박을 수도원에서 먹고 싶다고 마음대로 못 먹을 텐데... 잘 견디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은 수련기가 거의 다 끝나가서 먹고 싶은 과일, 간식 같은 것은 마음대로 꺼내서 먹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나마 남자 수도자들은 맥주나 와인 같은 것 정도는 마실 수 있어서 좋겠다. 여자 수도자들은 주변에서 단 한 명도... 본 일이 없다.    

이 수녀들의 수박 배틀 장면 관람 후, 영 이 공간의 삶에 심드렁해졌다. 마음의 지도를 잃고 지친 터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었다가는 찢어질 것 같아서 그저 심드렁해 있기로 했다. 그냥 하루하루 지나가다 보면 나도, 그리고 그도 늙어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해봤다. 


여전히 나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아니, 적극적으로 친절하려 노력들을 해댔다. 그리고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세 사람 중 한 명인 일루미나는 요즘 들어 부쩍 빨래를 마치면 내 것까지 가지고 와서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책상에서 자기 볼펜들을 열 자루도 넘게 꺼내서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마음에 들면 가지라고 했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는 볼펜이었는데도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면서 그냥 가져가라고 하니 안 가질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몹시 부지런했다. 모두 다 한 몸처럼 새벽같이 일어나서 우다다다 요란하게 소리를 내어 세수를 하고 미사를 드리고 일을 한다. 수녀원의 걸레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다. 수녀들은 시커먼 대걸레를 빨아도 도로 하얗고 보송보송한 면 걸레로 기어코 복귀시켜놓는 야무진 악력과 투지를 지닌 것이다. 

이렇게 하루를 마치고 그들은 여전히 불 꺼진 대성당에서는 귀곡산장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로 울음을 운다. 한 사람이 365일을 내리 우는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면서 슬픔을 담당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느덧, 한 해가 돌아 여름휴가를 가게 되었다. 수련 수녀들은 만 3년 동안 집에 갈 수 없다. 바깥 외출도 극히 삼간다. 필요한 물품은 보급 담당 수녀님이 한꺼번에 신청을 받아 외부에서 사서 나눈다. 그렇다고 아예 가족과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성소 주일이나 성탄 등 특별한 날에 가족들을 수녀원으로 초대해서 만난다. 사정이 이러하니 여름휴가라고 해도 우리 같은 수녀들에게는 그저 단체로 놀러 가는 것 정도의 의미다. 그래도 잠자는 시간까지 다 정해져 있는 빡빡한 수도원 생활에서 몹시 가슴 설레는 한 주가 아닐 수 없다. 이때는 특별히 오전 9시까지 늦잠도 잘 수 있게 허용해준다. 사실, ‘몇 시까지’라고 정해져 있는 늦잠 시간,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냐만, 그래도 매일 새벽 대여섯 시에 몸을 일으켰다가 누워 있을 수 있는 서너 시간이 늘어났으니 어마어마한 자유시간이다. 

경기도 시흥에 도창리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수녀원에서 일구는 포도밭이 있는데, 일손도 도울 겸 가는 것이다. 포도를 따서 직접 미사주를 만들기도 하고, 수녀원 간식 삼아 먹기도 한다. 8월만 넘어가면 수녀원은 온통 포도 냄새로 진동한다.      

다들 밀짚모자 쓰고, 몸뻬바지를 입고, 자기 발에 맞는 고무신들을 나눠 신었다. 그리고 포도밭에서 어중간한 키의 포도나무에 종이를 씌웠다. 나 같이 키가 큰 사람들은 몹시 힘든 자세가 나올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오히려 쭈그리고 앉아서 감자 캐기라도 했더라면 더 편했을 수도 있는데. 일루미나는 오늘도 자기는 키가 작아서 더 일하기 편하다면서 나보고 가서 쉬라고 한다. 사실 농사는 개인 할당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저 손 하나라도 더 보태서 일해야 한다. 대열에서 빠져나와 쉰다고 해서 편한 것만도 아니다.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쉬어야 하는 단체 생활, 우리는 이 단어에 그래도 자유를 조금 더 부여해서 ‘공동체 생활’이라고 한다. 


“베로니카, 좀 더 쉬어유. 목 다 꺾어지겄어.”


일루미나는 느릿느릿한 말투를 지닌 딱 충청도 사람이었다. 


“아니예요, 진짜 괜찮아요. 눈치도 좀 보이고.”

“사람 힘들다는데, 눈치가 어딨대. 가서 쉬어유. 여긴 내가 다 할테니께유.”

“아, 괜찮다니까요!”


결국에 역정을 내게 되었다. 참, 사람 오묘하게 불편하게 한다, 그녀. 내가 일을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와서 굳이 도움을 주려 하는 걸까. 미안한 마음에 저쪽으로 걸어가는 일루미나를 보고 있는데, 또 다른 동료 수녀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고장난 오르골처럼. 


“내가 할게유. 힘들쥬? 가서 쉬어유.”


내가 할게요, 내가 할게요... 뭘 그렇게 너 대신 내가 한다는 것인지. 이 공동체는 참으로 거룩할 정도로 이타적이다.      

그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특히 찌개같이 다 함께 먹는 음식을 가운데에 놓고 그는 단 한 번도 그릇에 나 대신 떠준 적이 없다. 그것이 딱히 이상하다고 여겨지진 않았지만, ‘보통의’ 한국 사람 같지는 않았다. 요즘은 국물 뜨는 것이 여자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제법 살림하는 남자들도 많아 국자로 그릇에 찌개나 국을 뜨는 폼이 제법들 익숙하다. 여하튼 그는 나 대신 음식을 떠주지 않았다. 대신, 늘 내 앞에 국자를 돌려놓았다. 


“너가 먼저 떠.” 


그것이 자기의 예절이라고 했다. 


“부대찌개를 먹는다고 쳐봐. 내가 떠주잖아. 그럼 지금 너가 뭘 먹고 싶은지 어떻게 알고 떠. 물론 나는 너가 부대찌개를 먹을 때 비엔나소세지 안 먹고, 납작한 스팸만 건져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떠줄 수는 있겠지. 그래도 가끔 너도 두부가 더 많이 먹고 싶을 수도 있잖아. 하물며, 나는 너를 잘 아는데도 이러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식사할 때는 어떻겠어. 그냥 너도나도 맘 편히 국자 앞에 놔드리는 게 낫지.”


‘내가 할게요, 내가 해줄게요’를 외치고 다니는 일루미나를 보면서 갑자기 그날이 생각나서 아렸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꽁꽁 봉인되었다가 이렇게 벌컥 범람할 때가 있다. 그가 사는 수도원에서도 이렇게 포도를 직접 농사지어서 포도주를 만들고, 성혈로 변화시키고, 다디단 포도를 원 없이 나눠 먹으며 공동체 생활을 할까.      

밀짚모자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났겠다 싶게 뜨거운 여름, 그렇게 일을 하다가 오후 5시에는 돌아가면서 씻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고 저녁을 먹는다. 삶은 옥수수에 포도에 참외를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한 명씩 잠자리에 들었다. 포도밭 분원은 방이 좁아서 대여섯 명의 수녀들이 한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야 했다. 마침 딱 두 명 정도 잘 수 있는 제일 작은 골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일루미나가 일찌감치 이불 펴 자리를 차지하고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와 그 골방에서 자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아주 쉽게...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일 대신 해주겠다며 축구 경기에서 공격수가 그라운드 누비듯 빈틈없이 다니니 피곤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냥 내가 그 방으로 베개를 들고 들어갔다. 설마 잠잘 때도 일어나서 귀찮게 굴려고. 내가 대신 자줄게요, 이러지는 않을 테니까. 

농사짓기도 큰 체력이 요구되는 활동인지라 나도 몹시 고단했다. 꿈도 안 꾸고 자던 중에 비몽사몽간 무슨 소리가 났다. 

득득. 득득. 득득득득득. 

눈을 감고 그 소리를 계속 들었다. 분명히 내 등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바로 돌아눕고 싶지 않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조금은 귀찮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이내 공포로 바뀌었다. 


“흐으으응~ 흐으으응~”


 일루미나였다. 벌떡 일어나 이불을 눈 바로 아래까지 가리고 쳐다보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에 비치는 일루미나의 그림자가 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만세를 한 후 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꿈을 꾸는 줄 알고, 손으로 등을 쳐서 깨울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떨리는 소리로 불렀다. 일루미나. 일루미나?


“흐으으응~ 나, 나좀 도와줘요. 나좀. 도와줘어!”


울음소리는 괴성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마루로 뛰쳐나갔다. 자고 있던 수녀들이 다 깼다. 일루미나가 이상해요! 일루미나가 이상해요!      

일루미나가 미쳤다. 

다음 날, 선생 수녀님은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일루미나를 데리고 부천에 있는 수녀님들이 가는 큰 병원으로 갔다. 우리들은 바로 본원으로 복귀했다. 수녀원 전체가 먹구름이 끼어있는 것만 같았다. 계속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꿇고 벽을 긁어대는 일루미나의 잔상이 어른거려서 나도 이거 상담을 받아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남들 도와주고 싶다던, 내가 대신해주겠다던 일루미나. 누가 그녀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고, 선생 수녀님도 우리가 수도자라고 해서 이렇게 징그럽게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는 아직도 믿고 싶다. 이 공간에만 들어오면 다들 즉시 올라왔던 그 편안한 표정들, 미소, 햇살, 행복. 그리고, 어둠만 내리면 그 은폐된 어둠 속에서 안심하고 울어대는 울음소리, 귀곡산장 같은 대성당. 그리고, 미친 사람. 그 다음 차례는 누굴까. 지긋지긋해도 좋으니, 제발 행복해지고 싶어서 들어온 이 공간이니까, 내가 지금 여기에 있으니 낡은 지도라도 내 인생에 지도를 들이대다오.

선생 수녀님은 저녁 시간도 한참 지나고, 대침묵 시간에 원으로 혼자 돌아오셨다. 우리는 공동방에서 입을 꾹 다물고 선생님 주위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다.      

선생 수녀님은 그저 일루미나를 위해 기도하자고 간단하게 말씀하시고, 모두 가서 하루 마무리 지으라 하셨다. 워낙 입성도 주변 정리도 매정할 정도로 깔끔한 분이시다. 오늘도 여전하다. 일루미나에 대해 쓸데없는 질문 나올까 봐 원천 봉쇄하신 것일 수도 있다. 워낙 사건도 많고, 소문도 많은 곳이 수녀원이니까. 


“베로니카, 잠깐 내 방으로 와요.”


대침묵을 깨고 선생 수녀님이 입을 여셨다.      

선생님 방은 처음 들어가 봤다. 역시나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리된 방. 선생님은 우선 기도부터 함께 하자고 하셨다. 무슨 기도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확실하게 외우는 것이 아니어서 더 긴장했다. 

일루미나는 의사의 집도 아래 최면 치료를 시행했다고 한다. 

이걸 왜 나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시는 걸까. 

그런데 최면이 걸린 상태에서 내 이름이 나왔단다. 

내가 그녀에게 포도밭에서 역정을 낸 것에 상처받았을까? 겨우 그거 가지고? 이 험준한 단체 생활에서?

밤마다 내가 몰래 빠져나가서 공동방에서 미사주를 가져와 침실에서 훔쳐 마셨다고 하는데. 

내가 밤에 몰래 어디로 빠져나가? 거기다가 술? 

최면 상태에서 일루미나가 한 말이, 이 상황이 사실이냐는 물음이었다. 

대답을 하기도 싫었다. 

그리고 일루미나가 이 사실을 알아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지금까지 참았는데, 정말 너무 외롭게 했던 것은 내가 다른 동료 로마나를 깨워서 둘이서만 그 미사주를 나눠마셨다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너무 외롭고, 서러워서 밤마다 이를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는 것이었다. 
 최면 걸린 사람의 이야기에 내가 해명을 해야 하나. 

선생 수녀님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같은 축 수녀들이야말로 평생 가는 동료이자 식구인데 이렇게 따돌림을 하는 것에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다. 

만약 일루미나의 말이 사실이 아니면 어쩌려고 이러시나 싶었다. 선생님. 사실이라고 못 박고 이야기를 시작하셨구나. 그럼, 내가 일루미나를 미치게 했다는 것인가. 일루미나가 미사주 훔쳐 마신 사람이 나와 로마나라고 했다면 왜 이 자리에 로마나는 부르지 않는 것일까. 내가 주동자라서?     


미친 것은 내가 아닌데, 우리 모두 다 미친 것 같았다.      


10년 뒤, 나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수도원의 식사>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절밥’ 혹은 ‘공양’에 대한 콘텐츠는 수두룩하게 많은데, 수도원은 아직 대중들에게는 장막이 높게 드리워져 있다. 그 취지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는 팀에 운 좋게 들어간 것이다. 물론, PD도 동료 작가도 내가 수녀원에서 잠시 살았던 것을 알고 추천한 것은 아니었다. 수녀원에서 나온 이후, 나는 그곳에서의 기억을 깨끗하게 소거했다. 아니 수녀원 입회 전 2년부터의 기억을 모두 도려냈다. 가능했다. 사랑을 잃고 수녀원에 제 발로 들어가서 제일 두려웠던 사실이 이거였다. 신이 없으면 어떡하지. 정말로 신이 없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계속 그곳에 머무른다면 이번 삶은 온통 거짓일지도 모르고, 억지로 최면을 거는 하루하루가 될지도 몰랐다. 
 적어도 지금 나는 최면을 걸며 살고 있지는 않다. 적어도 내 시야에서 받아볼 수 있는 정보로는 ‘신은 없다’고 판단했고, 그 길로 바로 걸어 나왔다. 만약 그가 계속 수도원에 있다면, 그는 오히려 나랑 이렇게 헤어졌던, 아니 나를 떠나 수도원으로 혼자 도망가는 편이 내겐 몹시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결론을 내렸다. 


 바닷가에 있는 한 수도원, 촬영 협조는 이미 사전에 해둔 터였다. 문지기 수사님이 우리를 맞이해주신다. 땅딸막하고 서글서글한 미소, 내가 그 공간에서 보아왔고, 동경했던 그 온화한 미소에서 조금은 장난꾸러기가 더해진 웃음을 지으셨다. 경상도 땅에서 듣는, 진한 전라도 사투리도 재밌었다. 먼저 문지기 프란치스코 수사님 안내로 수도원에서 대중에게 제일 많이 알려진 소시지 공장 취재를 했다. 독일 수사님 두 분이 1909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사시면서 고향의 맛이 그리워 만들기 시작한 것이 이곳 소시지의 시작이었다고 설명을 해주시는데, 아마도 이 이야기를 방문객들에게 수백, 수천 번은 했을 텐데도 여전히 눈빛에 자부심이 역력하다. 
 해질녘, 성물방으로 촬영지를 옮겼다. 바람이 찬 지금, 오후 5시만 되어도 이미 해가 기운다. 베네딕도 성물방에는 묵주, 반지, 성경책, 각종 종교 서적 외에도 소시지, 치즈, 와인 등을 판매했다. 독특하게 이곳에는 마주앙 화이트 와인, 미사주를 판매했다. 익히 아는 그 마주앙 브랜드. 하지만, 미사주는 포도 수확부터 제조 발효까지 우리가 사서 마시는 그 마주앙 로젤과는 라인이 다르다. 수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미사주 병을 바라보니 일루미나가 떠올랐다. 


“한잔 드셔보시겠습니까?”


화이트 와인 특유의 상큼하고 맵싸한 기운이 훅 끼쳤다. 어느 것 하나도 입 속을 방해하지 않는, 유리알 같은 맛. 남들은 버터향, 가죽향, 낙엽향, 초콜렛 등등 향기로 이야기하지만 내게 미사주는 특유의 입안에서 구르는 질감으로 기억된다. 두텁지도 않고 경직되지 않은, 찰랑이며 흩어지는 느낌.      

저녁 성무일도 후 식당으로 내려가는 수사님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진한고동색의 수도복을 입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내려가는 그들이 왠지 뿌리가 깊이 박힌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나지막이 식사 전 기도를 하는 그들, 수도원에서 울리는 남자들의 목소리는 낮고 넓게 깔린다. 수녀원에서 들었던 울림과는 다른 느낌이라 좋았다. 

저 속에서 혹시 내가 아는 이 있을까. 한 명, 한 명... 큰 도서관 책장에서 찾는 책이 있는 것처럼 꼼꼼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눈물이 네 뒷모습으로 가득 고여도... 노래가 들린다. 늘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그의 커다란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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