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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un 12. 2023

그냥 한번 들러봤어

2023년 6월 12일 서울 신문 칼럼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우리나라 전통 가옥에는 ‘사랑방’ 혹은 ‘사랑채’라는 공간이 있다. 오고 가는 손님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그러나, 이 방의 주인은 딱 잘라 ‘가부장’이요, 손님 또한 그냥 ‘지나가는 과객’이기보다 ‘묵객’, 즉 먹으로 글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다. 조금은 찜찜한 용도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요즘 흰머리가 기승을 부려 정기적으로 미용실에 간다. 다행히도 얼마 전, 동네에 아주 솜씨 좋은 미용실을 발견했다.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곳인데,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편안해서 단골 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날도 나는 염색약을 잔뜩 바르고 앉아있었다. 

한 초등 2~3학년 정도 되는 아이가 가방을 메고 미용실로 들어왔다. 사장님이 맨손으로 머리에 땀을 닦아주면서 날도 더운데 왜 이렇게 뛰어왔냐고 한다. 

“더우니까 아이스크림 먹을래?”  

이 질문에 “아니요.”를 외칠 어린이는 없다. 사장님에게 돈을 건네받은 아이는 후딱 밖에 나가서 아이스크림콘을 입에 물고 돌아왔다. 야무지게 과자까지 다 먹고 나더니 양말을 벗는다. 벌레에 물려서 간지럽단다. 사장님은 아이의 발을 슥 보더니 말없이 밖으로 나간다. 

그사이 조금 더 큰 덩치의 아이가 미용실로 들어왔다. 얘도 가방을 의자에 벗어놓고 반 드러눕는다.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학교는, 아니 학교는 갔다 오면 힘든 곳이다. 

돌아온 사장님 손에 연고가 들려 있다. “양말 벗어 봐.”하면서 약을 발라준다. 그리고, 나중에 온 친구에게는 냉장고에 물 있으니까 마시란다. 아이는 고분고분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신다. 

나는 머리가 예쁜 검은 색으로 물들기를 바라며 이 모든 광경을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숙제해도 돼요?”

보리차를 마신 아이가 물어본다. 먼저 와 있던 아이도 나도! 그런다. 조금 의아하던 그 순간, 들리는 사장님의 말씀.

“너희들 엄마한테 먼저 전화하고 여기서 숙제해. 어서.”

사장님이 이 꼬마들의 엄마가 아니었잖아! ‘무심한 다정함’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 평소에 엄마가 그러듯, 아무렇지 않게 동네 꼬마들에게 아이스크림 사주고, 보리차 준비하고, 벌레약 발라주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혹시 얘네들 엄마한테 부탁받은 것일까, 궁금함을 못 참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그냥 아이들이 학교 끝나면 들어와서 놀다 가는 거란다. 모르는 애들도 가끔 오는데, 다들 알음알음하는 친구들이라 그냥 놀다 가라고 한단다. 사장님도 아들이 2학년인데, 남의 자식들 잘 봐줘야, 언젠가는 나도 도움받을 날 있지 않겠냐면서.

염색을 마치고 일어났는데, 어린이집에서 딸을 데리고 오던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언니, 집 가다가 그냥 한번 들렀어요.”

그냥 한번 들러보는 곳이 된 이곳. 따스한 동네 사랑방이다. 누구랑 만나려면 약속 미리 잡고, 시간과 장소 딱 정하는 것이 몸에 밴 내가 이리 우연에 맡기는 만남을 오랜만에 보니 감동이 크다. 나도 미용실에 방울토마토랑 요즘 한창 물오른 앵두 씻어 그릇에 담고는 그냥 한번 들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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