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섬 Sep 03. 2023

우리는 한 배예요, 작가님!

미팅을 마치고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작가가 쓴 에세이? 평론? 등등등이 혼합된 책이다. 오늘 아침에서야 오디오북으로 다 들었다. 

작가의 말이 다 끝나고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라고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캐롤 멜로디가 나오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게 책의 힘, 글의 힘이 아닐까 한다. 


이 관문을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얼마나 영리하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만 천착해서 몹시 지쳐있던 나에게 영감을 준 책이다. 글쓰기라는 작업을 할 때 그 앞에서 얼마나 사람이 깊이있어야 할지,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선은 어느 정도 온도를 맞춰야 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듣는 내내 너무 외로웠다. 문학 쪽 동네(?)는 그래도 참 따스하구나. 그래서 아마 눈물이 쏟아졌던 듯하다. 오늘 아침. (물론 이 구절을 읽고 할 말이야 많지만, 차마 못 하겠다는 작가님들도 계셨지만, 그건 장강명 작가도 이 책에서 충분히 설파했다. 목에 핏대 올리며) 


여하튼 나는... 결심했다. 

평생 꾸준히 묵묵히 드라마, 영화 쓰기로.  

그리고 내 컴퓨터 파일에 잠들어 있는 소설들 다 끄집어내어서 천천히 쓰기로. 그것들만 다 완결지어도 아마 55살은 훌쩍 넘어갈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는 조금 더 강력한 '당사자성'을 가지고 소설로 다시 써낼 결심이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어쩌면 이태리, 포르투갈까지 넘어가서) 수도원 밥 먹으러 다니면서 그 맛있고도 경건한 기록을 남길 것이고, 혼밥 혼술하면서 옆 자리 들리는 이야기 다 모아서 에세이 쓰기로(신문 칼럼으로 이미 3년째 남기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발달장애인 가족으로서 조금은 목소리에 힘 내어 글 써보기로. 


처음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데에서 어떤 글을 쓰고싶은가로 중심추가 이동하는 경험을 경험하고 있다.

장강명 작가에게 무척 감사한다. 장강명 작가님은 변방의 북소리를 둥둥도 아니고 '동동' 조그맣게 울리고 있는 한 듣보잡 작가가 이렇게 고마워하는 줄 모르고 계실 것이다. 

글, 요 몇 줄 쓰는 내내 계속 눈물이 난다. 아, 진짜 왜 이러냐.



위의 글을 쓴 것이 닷새 전이었다. 

오늘, 일요일이지만 감독님과 드라마 회의 하러 대학로에 나갔다. 급하다. 시간이 없다. 벌써 9월이 넘어버렸다. 8월 안으로 대본 1,2화 완료하기로 해놓고... 

기획안부터 시작해서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대본도 제작사에서 크게 두 번이나 빠꾸 먹었다. (이 말 천박한듯 들려서 되게 싫어하는데 느낌 딱 오는 단어가 이것밖에 없다. 빠꾸 먹다.......) 

내용의 흐름도 커다랗게 바꾼 것만 내 기억에 세 번이다. 이번 마지막에 짠  구조는 진짜 위기감을 느끼던 날 새벽에 일어나서 정리한 내용과, 동시에 나만큼 위기감을 느꼈던 감독님의 아이디어가 맞아 떨어져 만든 이야기틀이다. 아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주인공의 직업과 이야기 구조일 것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주 뜨거운 여름에 이 구조가 완성이 되었고, 지금 일단 1화 완성해서 함께 봤다. 그 2-3개월 동안 솔직히 이야기하면 자꾸 나 학생처럼 가르치려는 감독님도 너무 밉고, 드라마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었었는데 결과로 놓고 보면, 많이 배웠다.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소화도 안 되고, 새벽에 잠도 못자던 날들도 있었는데 잘 건너온 것 같다. 


- 작가님, 우리는 지금 한 배를 탄 거예요. 


감독님 이 말씀 한 마디가 가장 힘이 되었다. 가끔은 제일 미웠는데, 이렇게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 여기에서 절대 그만두면 안돼요. 우리는 꼭 끝까지 완주해야 해요. 


지금 드라마판, 한국의 드라마판은 재작년 'D.P', '오징어게임' 샴페인 터뜨릴 때와 판이 다르다. '무빙'과 '마스크 걸' 선전이 고마울 정도다. 디즈니는 일 년에 네 편 들어가겠다고 하는데, 이미 세 편은 마감 됐고, 한 편만 라인업 결정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연간 드라마 4개 라니.... ㅠㅠ

지금 겨우 대본 1화 쓰고 있으면서 지금 무슨 드라마 편성 빅픽쳐를 계산하고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캐스팅까지 다 마쳐서 기사까지 나왔는데, 플랫폼이 확정되지 않아서 중간에 스돕(너무나 한국적인 멈춤!)된 작품들만 수십 개가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난자 하나를 향해 정자 수억 마리가 돌진하고 있는 풍경과 다르지 않다. 그중 단 한 마리만 선택된다. 

나도, 감독님도, 그리고 제작사도 그 '한 마리'의 정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미팅 취약형 인간 구조를 타고난 사람이다. 

누가 나를 공격하면 사막의 타조가 된다. 얼굴을 모래밭에 묻고 싶다. 그리고 바이탈 사인이 바로 흔들린다. 심장 박동수, 동공의 크기, 당연히 땀구멍 크기까지! 횡경막은 2배속으로 들렸다 앉았다 한다. 포커 페이스는 당연히 안면 근육의 구조상 되지 않는다. 마음 근육도 나약해서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지난 달 마지막 미팅 때는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서 대본 '재미 없다'고 몰아치는 대표님 앞에서 울었다. 


- 아니예요! 내 꺼가 더 재밌어요! 


이러면서 울었다. 창피하다. 매우...... 


그래도 장강명 작가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읽은 뒤로 나는 조금 바뀌었다. 조금 더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진짜로!) 드라마에 목숨을 걸기보다는 내 작가의 생명을 더 길게 놓고 달리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다.  물론 이 드라마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각색한 영화도 끝까지 잘 되어야 한다. 계약을 마친 에세이와 소설도 완주할 것이다. (이 세 문장은 쓸까 말까 했다. 맨날 열심히 할 거야, 다 잘 할 거야! 이런 이 악물고 다짐이 가끔 나 스스로도 꼴보기 싫을 때가 있어서 말이다....)


그래도 나와 한 배를 탄 감독님들이 계시고, 일이 있으니 다행이다. 참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다가 아닌, 어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처음이다. 농담처럼 매번 던졌던 '백상 예술대상 각본상 타고 싶어요' 이딴 헛소리도 이제는 거둬야겠다. 다 부질 없으니... 

<나도 스타가 되고 싶어>라는 가제로 에세이를 계약해서 쓰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너무 쓰고 싶었던 인간이 우여곡절 끝에 계약을 한 후 하나하나 써내고 드라마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담은 '여행기'다. 물론 이 원고도 그 책의 한 꼭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맨 처음 이 책을 기획했을 때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때는 진짜 '스타'가 되어서 레드 카펫을 밟고 이 책을 마무리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출판사와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어쩌면 이 책은 저 뒤에, 내 인생의 말미에 완성이 되어야 옳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1-2년 사이에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니 원... (그러나, 이것이 기획 에세이의 묘미다!)

오래 글 쓰고 싶다. 언제든 이야기가 안개로 가리워져 한치 앞도 안 보일 때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을 수 있는, 한 배를 탄 사람들과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드라마 데뷔는 꼭 피를 말려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