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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들_가족

1988 VS 2020 엄마와 딸의 타임랩스

by 황섬

내 마음과 삶의 80프로를 이상 차지하는 것은 바로 '엄마와 아빠'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늘 쓰면서 죄책감이 든다.

'나는 너를 키우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고, 해줄만큼 다했다'가 엄마의 주장이고, '사실 그렇게 잘해준 것은 아니지만, 에유~ 말을 말자.'하며 거북이처럼 고개를 쑥 집어 넣어버리는 것이 아빠의 대화 형태다.

나는 기필코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제외하고는 가족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 이게 무슨 느낌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말도 안 통하는 마귀같은 엄마와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고, 나중에 덩치가 좀 커져서는 침대 위에서 아주 레슬링을 했었다. 엄마가 팔꿈치로 내 등을 찍으면 나는 엄마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는 정도의 격한 무대였다. 옆에서 누군가가 라운드 마다 공을 울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 장면!


그 전으로 시계를 돌려 엄마의 존재 자체로도 나를 찍어누를 수 있던 열살 무렵까지의 시절은 내 기억의 많은 부분이 욕심 많은 엄마가 하도 많이 때려서 온 호흡곤란으로 가득차 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어린 내가 실수를 했을 것이다) 엄마는 화가 나서 내 머리끄댕이를 잡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중에 커서 통쾌하게도(!) 내가 엄마의 머리채를 잡았지만...)

그러고는 붕붕 돌려서 머리를 벽에 찧었다. 심하게 화가 나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아팠다. 숨이 막히게 아팠다. 가끔 토할 것 같기도 했다.

얼른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맞을 것 다 맞고, 때릴 것 다 때리고는 쓰러진 나를 방바닥에 놔두고, 엄마가 쌩하니 안방을 나가고 난 다음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그 햇살에 솔솔 잠이 오면서 행복했다.

지금도 기억난다 창밖으로 파란하늘에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매미 소리도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눈이 살살 감겼다. 그전에 그렇게 많이 울고 진을 뺐으니 잠이 올만도 하지.

엄마한테 맞으면서 너무 너무 많이 울어서, 울다가 숨이 넘어가던 내 아기 때 목소리가 들린다.

허!헉! 허! 으어어~ 헉! 허!허!

불쌍하다. 눈물 난다.


엄마는 늘 화가 나면 빗자루로 나를 때렸는데, 한 번은 잘못 빗맞아, 아니 제대로 맞아서 왼손 엄지 손톱이 빠졌다.

'아빠한테 이거 피아노 뚜껑에 찧었다 그래. 알겠지?'

엄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손발이 늘 차가웠던 나는 엄마와 나, 둘만의 비밀이 생겨 너무 좋았다.

기쁜 나머지 엄마의 말씀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퇴근한 아빠에게 신나게 거짓말을 했다. 그날 밤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작은 방, 피아노가 있던 방에서 아빠에게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면서까지 설명했다.

아빠가 내 빠진 손톱, 상처에 관심을 주었는지는 잘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사랑스런 아내가 내 아이이자 그녀의 아이를 빗자루로 마구 때려서 손톱을 빼놨을 것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예측은 되는데, 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겁장이 아빠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아빠는 나랑 엄마가 미친듯이 소리 지르며 싸우고 있으면, 엄마 없이 자랐던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관종처럼 드러내며 '나는 이런 싸움들이 싫다'며 작은 방으로 들어가 기이하게 피아노를 쳐댔다.

늘 연주하는 곡명은 '어머님 은혜'와 일송정 푸른솔은 '선구자'였다.

아마 아빠를 키워주시던 할머니와 새어머니 사이의 싸움이 아빠에게는 불안한 트라우마로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신데렐라 아빠처럼 감정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빠가 마녀같은 엄마보다 더 싫을 때가 많았다.

엄마는 워낙 태어난 집안 환경이 못된 배경이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아빠는......

아빠는 딸을 구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이 모든 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거짓말)한다.


울화.

나를 부모와 함께 병렬로 놓고 생각해보면, 내 스스로에게 최종적으로 처방하는 단어는 울화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시고, 회사를 접으신 후 우리집은 참 많이 암울했었다.

다들 아빠 사업 실패 스토리는 하나씩 있지...

서울 집을 처분하고 그때는 시골시골 고리고리 시골이었던 남양주 진접으로 도망치듯 이사를 갔다.

지금도 진접은 나름 시골의 정취를 갖추고 있지만 이때는 진짜 논밭에 아파트 한 대 덜렁 성냥갑처럼 놓여 있었다.


집이 너무 멀어 학교 다니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대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원 영어 선생님 노릇을 하며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돈만 아는 뚱땡이 원장, 여차하면 애들 따귀나 따악따악 후려치는 저팔계 원장하고 둘이 일했다.

마지막 교시는 제대로 다 듣고 가지도 못하고 학원으로 뛰어가던 나날들이었다. 밤 11 시, 12시에 끝나 집에 돌아오면 언제 전공 공부나 할까.

대통령이요, 과학자요, 외치던 어린 시절의 내 꿈은 이쯤부터 제대로 성인 버전으로 설계를 해서 빅픽쳐를 그려야 하는데 도저히 겨를이 나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도...

방학이 되어 남자 친구가 자기 친구들도 다 여자친구 데리고 온다고, 같이 스키장을 가자고 해도 못 갔다.

학원에 휴가를 낼 자신이 없었다. 선생이 나 한 명인데... 그것도 서초국민학교 앞에 있던 학원이었던지라 나름 빡센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학원에 정도 못 붙이고, 스무살 젊은이는 그냥 너덜너덜해져갔다.

차라리 운동권이라도 들어가 으쌰으쌰 '불온서적'이나 맘 맞는 동지들과 함께 공부하면, 연대의식으로 마음 든든하련만 암울했다.


90년대 뜨거운 여름.

나는 방학 때도 학원 알바를 나가며 학교 앞 자취방에서 당연히 에어콘도 없이 쪽창 하나에 머리 박으며 언제 가을바람 부나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숯불갈비 간판 바로 앞에집이 자취집이다.


학원도 일주일 정도 방학이 있었던지라 그때 진접 엄마 아빠네 집으로 쉬러 갔다.

오랫만에 집에 와서 기분좋게 쉬고 있는데, 서재에 들어가보니 가족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분명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내 동생... 네 식구의 가족 사진이다.

아, 네 식구. 우리 네 식구이긴 한데, 내가 없다.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캥거루가 한 마리 있었다.

캥거루가 그렇게 남자 어른키만큼 큰지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난 방학 내내 어디 제대로 놀러가지도 못하면서 학원에서 돈 벌던 내가 떠올랐다.

아빠 사업 망해서 우리집 가난하다며, 왜 나만 가난해?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당찬 계집애, 그런데도 앞날 계획 조차 세우지 못한 비루한 나만 빼놓고, 이 가족이란 이름의 세명은 호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나도 비행기 타고 싶고, 나도 여행 가서 근사한 호텔에서 자고 싶다.

엄마, 아빠가 사주는 맛있는 저녁도 먹고 싶고, 마음껏 군것질도 하고 싶다.

왜 나한테 비밀로까지 하고 갔다 왔어야 했는지.

어떻게 가족 여행에, 많지도 않은 식구 네 명 중 나만 놔두고 훌쩍 갔다와서, 뭘 잘났다고 자랑스럽게 가족사진을 걸어놓냐!
당장 그 액자 끌어내려서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 장식장에 숨겨져 있는 아빠 꼬냑을 꺼내서 꿀꺽꿀꺽 반병은 다 마셔 버린 것 같다.

액자 깨진 유리에 손가락도 베고...


엄마는 동생이 다음 학기 호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가게 되었는데, 그 학교를 같이 둘러보고 왔다고 엉성한 핑계를 댔다.

동생은 나와는 다르게 이후로도 계속 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한국의 엘리트 성장 코스를 그대로 밟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동생이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했을 때도,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 또한 세 사람의 가족사진으로 남아서 친정 거실에 고이 놓여 있다.

셋은 나파밸리를 포함해서 졸업 기념 미국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이후로도 금슬이 남다른 부부님들은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보러 또 둘만 훌쩍 떠나셨다.

나는 그 호주 캥거루 가족사진 사건 이후로 가족, 식구에 대한 개념 다 쓸어버렸다.

그리고, 원하는대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뭔지 모를 장님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이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어떤 줄타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글을 그들이 본다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나를 아예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남의 이목과 체면 꽤나 차리는 엄마는 어디서 우리 가족 욕을 먹이냐고 광광댈 수도 있겠고, 정말 섭섭한 일이라면서 굵은 눈썹을 찌푸릴 아빠의 얼굴도 익히 상상이 된다.

삐지기는 엄마보다 더 잘 삐지니... 돌봐주고 싶지도 않은 그 나약한 감성.

곰돌이와 나의 이야기를 꼭 기록해두어야겠다 생각한 것도 바로 엄마 아빠 때문이었다.

그들도 젊었기에, 엄마 아빠 노릇을 처음 해보기에 저질렀던 과오를 나는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그리고 내 개인의 사료로 남긴 항거다.


소설가 김별아 씨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식구라고 했다.

'사랑하는'이란 단어를 나는 언제 붙일 수 있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한테 어떻게 이렇게 빅엿을 먹일 수 있느냐, 오십 다 되어서 부모 욕해서 뭐 좋은 게 있다고 그런 거냐, 정신차려라.

이런 생각이 드시는 분께는 정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사랑하는, 좋은' 부모님에 당첨되셨기 때문이다.

로또 당첨보다 더 멋진 일이다.


길고, 지루한 팔자타령인 이 글을

겉은 다 늙었는데도 여전히 울면서 나좀 봐달라, 사랑해달라는 내 안의 어린애를 평생 혼자 달래느라 고달프셨고, 지금도 고달픈 분들께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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