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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Dec 21. 2023

보통 사람들의 불안

그대, 불안에 영혼을 잡아 먹힐 텐가.

불안하다.


한 보름 전쯤 '핏빗'이라는 시계도 되고, 심박수도 측정하고, 걸음수도 세어주고, 수면시간과 함께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까지 알아봐주는 여하튼 여러모로 유용한 워치를 구매했다. 무엇보다도 척 보면 다들 '애플워치 샀냐'고 물을 정도로 디자인도 예뻐서 흡족했다.
특히 이 워치는 하루 서너 번, 일정한 시간에 나에게 묻는다. 지금 기분이 어떻냐고. 물론 주관식은 아니고, 객관식이다. 즐겁다, 차분하다, 편안하다, 불안하다, 화가 난다 등등... 몇몇 기분들 중 지금 나의 상태를 골라서 톡톡 쳐서 입력하면 핸드폰의 어플과 연동이 되어 일정 기간 동안의 내 기분을 분석해서 데이터로 저장해준다. 요즘은 참 살기가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빅 브라더의 감시에 나도 모르게 말려들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기계를 구매한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부정적인 기분 상태로 체크한 적이 없었다. 늘 편안하다, 차분하다... 아주 역동적으로 즐겁다거나 행복하다는 벅찬 기분까지는 가 닿지 않아도 그저 소소하게 잔잔했다. 그러나, 어제, 처음으로 다른 기분 상태를 눌러 체크했다.


"불안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안감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뭐뭐해서 그렇게 되면 어떡해.'나 '아무래도 뭐뭐하게 될 것 같아.'라는 생각으로 골머리가 가득찼었다. 일상에서 조금만 예상에서 벗어나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감이 이어졌다.

이 불안감은 30대에 접어들면서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극도로 치달았다. 이놈의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가 봤더니, 역시나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짓눌려 있다는 그 걱정, 바로 돈 걱정이었다.

나는 노래 잘 불러, 춤 잘 춰, 게다가 술 잘 마시고, 잘 놀아 소싯적부터 재주가 그렇게도 많아서 제발 한 우물만 파라는 말도 참 많이 들었는데, 유독 이 돈 버는 재주만은 없었다.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돈을 많이 벌려면 면, 젊은 시절 가장 좋은 재테크는 내가 하는 일에 일가를 이루든, 이가를 이루든 실력을 쌓아서 몸값을 높여나가는 것일 텐데 나의 나의 2-30대는 허송세월 그 자체였다. 지금 돌아보니...

주구장창 누군가와 사랑하고, 하루하루 연명하며 반짝! 하고 사는 것에만 바빴던 것 같다. 물론 그동안 나의 자식들도 세상에 나왔으므로 그 녀석들을 키우느라 시간에 쫓기기도 했지만 말이다. 뭔가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던 시기는 아니었다.

돈에 대한 불안 이전에 내 삶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가졌더라면 시간을 쪼개 셀프 죽비로 패든지 해서 정신 차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텐데... 여하튼 그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딱 원하는대로 풍족하게 사는 세상에 사람 많겠냐만, 이렇게 소외당할 수는 없다. 인생, 한 번 정도는 좀 어깨 펴게 해주셔야 할 것 아닌가. 늘 내가 원하는 금액을 벌어본 적이 없다. 돈을 구해도 필요한 돈의 7할 혹은 8할 정도만 들어왔다.  



나의 가난한 21세기 블루스

그렇게 가난한 상태로 나의 21세기는 시작되었다. 당장 다음 달만 바라보고 사는 신세가 매년 지속되었다.  정말 인생 테트리스도 이런 테트리스가 없었다. 다들 테트리스 게임을 해보셨으리라 믿는다. 위에서 예측할 수 없는 여러가지 모양의 네모 조각들이 마구 쏟아져내린다. 그러면 우리는 그 조각들을 요리조리 움직이고 뒤집어 일자로 메꿔가면서 가지런히 갖다 꽂아야 한다. 한 칸이라도 비면 안 된다. 예외는 없다. 나의 경제 상황과 맞물려서 비유하자면 파산이다. 전달 끌어쓴 돈 이번 달 메꿔 넣고 이번 달 또 끌어쓰면 다음 달 메꿀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쉼 없이... 은행은 이런 내게 1개월의 여유도 주지 않고 협박까지 한다. 너어~ 이번 달 연체했어~? 좋았어. 다른 은행도 다 막아버릴꺼야! 안 그래도 돈 없어서 다른 은행까지 서커스하듯  넘나들어야 하는 가난한 인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든다. 돈을 꿔야 할 사람은 정작 현금이 없는 비루한 사람들인데, 은행은 돈 많은 사람들한테만 후하게 인심을 베푼다. 우리 은행 돈 가져가시라고, 그것도 가난뱅이들보다 더 싼 이자에... 이런 완벽한 어불성설이 다 있다니!


신세기가 시작된 지도 어언 20년이 될 즈음,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집 경제 생활을 하는 자 두 명 중 누구한 명이 고장 나서 아프거나 파업을 해버리면 답이 없다. 물론 한두 달 정도는 어디서 돈을 꿔서(그래봤자 카드사에서 빌리겠지...) 버티겠지만, 그 한두 달이 사람 사는 한두 달이겠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씀씀이가 아주 큰 것도 아니다. 마트에 가면 연어를 집었다 놨다, 요즘 제철인 생굴을 한 봉다리 더 집을까 말까 하는 내 손이 애처롭다. 어느 순간부터 대형마트에 가면 쿠팡 어플을 열어서 열심히 가격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안 돼, 여긴 비싸, 나중에 사자. 이런 류의 끊어내기는 내가 달인이다.

십 수년 전부터 물려온 악성 부채의 상흔이 아직도 우리 가정 경제에 남아 있는 까닭이다.


불안의 어퍼컷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와중 갑자기 어제 '불안'이라는 녀석이 아주 오랜만에 나에게 어퍼컷을 날렸다. 보통 현금 잔고는 향후 3개월 치 쓸만큼 남겨놓으라고 한다. 이론은 알지만, 현실은 당장 다음 달 어떻게 될지 몰라서 계산기를 두들겨봐야 했다.

그런데, 일은 신기하게도 한꺼번에 닥친다. 단 하루에 내게 밀려들었던 파도를 보자면...

고3이 되는 딸은 학원을 하나 더 듣겠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연말이 됐다고 어디론가 가까운 데라도 여행을 가잔다. 학교에서 온 전화에서 우리 막내의 돌봄 교실 방학 급식 신청하면 18만 원이 스쿨 뱅킹에서 빠져나간다고 한다. 오케이. 점점 숨이 차오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괜찮다. 딸의 과외비 입금일이 다음 주란다. 알고 있었다. 으악! 월세를 입금했나? 확인!
이 모든 것을 체크하고 처리하자니 노곤해져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커다란 결심을 하고, 새벽 독서 모임에 3개월 치 회비를 냈다. 지나간 일들의 패턴을 보아하니 늘 궁지에 몰릴 때마다 더 큰 기회비용을 치뤄야 할 일이 생겼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그때의 부담감은 언제 있었냐는 듯 싹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이 그 기회'다 생각하고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회비를 입금했다.


먹고사니즘의 불안은 내게는 늘 커다란 숙제였다. 도대체 다들 어떻게 집들은 사는지, 무슨 돈으로 평수를 늘려만가는지도 궁금했다. 지구에서 태어나 한국이라는 곳에서 벌써 반 백년을 살아온 내게 '집'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라기 보다는 경외 혹은 궁금함의 영역이다. 내집 마련, 내집 마련 그러는데, 어떻게 마련하지? 나는 서울 언저리 이 작은 동네에 전세를 얻고 사는 것만으로도 내가 대단해보이는 걸?

그러나, 사람들은 아니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좀 아닌 것 같을 때가 있다. 처음 계약했을 때보다 두 배나 뛰어버린 전세자금대출 이자를 보면... 이 돈이면 좀 더 넓은 곳 월세를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집의 영역은 그저 나를 웅크리게만 할 뿐,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현재의 내 최고의 재테크는 오로지 작품을 잘 쓰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계약한 드라마, 얼른 빨리 통과하고 써내야 2차 중도금을 받을 것이며, 순항해서 제작까지 가야 잔금을 모두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공 여부에 따라 다음 작품을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나이가 들어서 또 하나 알게 된 것!

그동안 제일 큰 걱정은 돈 걱정이었는데, 보니까 자식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돈 걱정만큼의 위험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이도 만만치 않은 불안의 요소였다. 돈 걱정은 나이들면서 좀 나아지기라도 했지, 자식 걱정은 아이가 점점 크면서 더했다. (지금 아이들이 어린 분들은 다들 각오하시라. 하하!)


그동안 깊은 불안의 심연에서도 어떻게든지 잘 기어 올라와 살았듯이 또 앞으로도 어떤 행운이 올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무척 간사하다. 어제 저녁, 정신없이 썰물처럼 밀려 가는 통장의 잔고를 한 번 더 확인하다가 오래간만에 입금의 파란 숫자를 발견했다. 25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서울신문 칼럼 원고료이다.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돈은 이 금액에서 공이 두 개는 더 찍힌 숫자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소박한 파란 숫자 하나를 보고 불안의 반 이상이 가실 수가 있을까.

남편은 어제 프로젝트 하나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끝냈다고 카톡이 왔다. 그래, 일 털은 기념으로 날도 추운데 뭔가 인상적인 국물을 하나 끓여서 작은 파티를 열자 싶었다. 마트 밀키트 코너 앞에서 한참 서성였다. 밀푀유 나베 유통기한 임박한 것 할인해서 24000원, 커다란 점보 부대찌개 또 할인가로 14000원... 어떤 것을 고를까. 부대찌개도 얼큰하니 이 날씨에 딱이긴 한데, 밀푀유나베가 몸에는 훨씬 더 좋을 것 같고... 또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알배기 배추에 차돌박이 조금 사다가 끓이면 24000원까지 안 들여도 될 것 같은데, 품 들일 시간은 없고, 귀찮기도 하고... 시간을 아낄까, 돈을 아낄까... 빙글빙글 머릿속에서 한참을 짱돌을 굴리다가 그냥 밀푀유나베를 집어 들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남은 국물에 우동 넣고, 밥까지 비벼 먹으며... 어떻게든 되겠지.




삶은 달걀......

요즘 자꾸 글을 쓰면서 뭔가 정답을 내놓으려고 하는 버릇이 생겼다. 정답이 어디있을까. 그냥 나는 이렇게 매사에 불안한데, 당신은 어떻나요? 아, 여러분도 불안한가요? 아, 아니라구요. 편안한 이들에게는 그만한 넉넉함을 축하하고, 나보다 더 불안한 이들 혹은 나만큼만 불안한 이들은 다시 어깨동무 고쳐 하고, 함께 앞으로 나가면 그만인 것을...

이번에 책을 몇 권 주문했다. 오늘 새벽에 만난 글귀인데, 불안한 나, 많이 불안했던 나에게 알맞은 글귀인 것 같아 이곳에 소개하고 마무리한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한 장애가 된다.

...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뻔한 문구 같지만, 나는 이 글귀에서 '영혼'과 '희생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어떤 단어가 눈에 들어오시나요.




P.S. - 스누피 만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한 때는 내가 세상에서 스누피 만화를 제일 많이 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맞을 거예요. 찰스 슐츠 작가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1950년 10월 2일부터 2000년 2월 13일까지 50년간 그린 피너츠 만화(원제는 스누피가 아니라 '피너츠'임)를 다 봤거든요. 물론 북하우스에 전집 번역본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화제가 되었던(?) 책을 소개합니다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43868346


이 책을 편역하는 동안, 미국 본사랑 진짜 지겹게도 밀당을 많이 했습니다. 글씨체 하나하나, 구성 하나하나까지 모두 관여하는 바람에 말이죠. 출판사 대표님도 엄청 고생하셨어요. 게다가 책 뒤에 스티커북을 만들지 않으면 출간 안 된다고 해서 부랴부랴 디자이너 님께서 고생을 더 하시고요. 그래서 이 책은 유아책도 아니고, 어른책도 아닌... 어정쩡한 스페이스를 차지해버린 책이 되었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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