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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Dec 22. 2023

친애하는 양에게

당신에게 집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느 때서부터인가 메일함에 특이한 뉴스레터(?) 비슷한 편지가 당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부러 구독한 것 아니고는 이런 류의 메일은 스팸으로 처리하기 마련인데, 왠지 이 '양'이라는 사람에게서 오는 메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꼬박 꼬박 빠짐없이 읽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 이 사람의 글은 마치 친구가, 연인이 나한테만 주는 편지글 같았다. 콕 집어 나한테만 주는 편지. 그리고, 내용이 과하지도 않고 밀도가 떨어지지도 않아서 편지를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 이 사람이 누굴까 궁금함은 당연히 조미료로 뿌려지고.

이번 주에는 양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익명이다. 내가 이름을 쓰지 않는 이상... 이 사람은 내 이메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불쾌함이 아니라 간택(?)되었다는 즐거움마저 있는 뉴스레터다.


친애하는 '양'에게.

어느 동네에 사시는지 참 궁금하네요.

전 집이 제 인생에서 주는 의미가 참 크답니다.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고, 제발 한 우물만 파라는 소리를 수없이 많이도 들을 정도로 재주가 많은데, 단 한 가지 재주, 돈 버는 재주가 없거든요. 지금도 나이가 적잖기도 하고, 아이들도 덩치들이 커가는데도 그냥 식구들 몸 뉘어 잘 정도의 오래된 아파트 전세를 살고 있어요. 지금도 어떻게 집의 평 수를 늘려서 이사 가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면 달마다 나가는 전세자금대출의 이자를 영리하게 줄일지 방법을 모른답니다.

그냥 한 달 한 달 살고 있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날씨가 추울 때는 더더욱 집이 고마워요. 집을 지은지 오래되어 비록 샷시도 알루미늄도 아닌 나무지만, 이 나무 창문 하나를 두고 안으로 들어오면 무척 따뜻하거든요.

제가 좀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감사합니다. ^^) 이 작고 오래된 집에 감사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 전만 해도 2년 마다 전세 재계약하는 것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거든요. 게다가 우리집 평 수 정도 되는 규모는 주인들이 사는(live) 집이 아니라 사고(buy) 팔기를 반복하면서 재테크 수단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집주인이 아주 자주 바뀌었습니다. 매번 바뀌는 집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성향일까, 착할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피면서 신경을 썼어야 했죠.

그렇게 치솟는 전세가 때문에 한참 걱정을 하던 때였어요. 저나 남편이나 오래된 악성 부채의 상흔으로 많이 고생을 하고 있었죠. 어떻게 수천만 원을 뚝딱 구하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들 그렇게 집 크기를 잘만 늘려 나가나. 점프, 점프, 점프 세 번만 하면 서울에 아파트 한 채는 내집으로 마련할 수 있다는데, 어디서 그런 재주는 얻어오는 걸까. 궁금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마음씨 좋은 복덕방 아주머니가 요즘 전세랑 매매랑 가격이 얼마 차이가 안 난다면서 좋은 기회니까 사라고. 귀가 솔깃해진 저는 그래요? 하면서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택도 없었어요. 같은 사무실에 계셨던, 부동산 컨설팅해주시는 분은 어쩌면 이렇게 자금이 없으시냐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며(진짜로!) 컨설팅 비용도 안 받으셨죠. 지금 생각하면 그 마음들이 다 고마울 뿐이에요. 그에 부응을 하지 못해서 그렇죠. 이렇게 개털인 고객은 일단 재미없잖아요.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한 통 왔어요.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잠깐 건너 건너 만나기도 했고,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한 분이었죠. 자주 댓글을 달아주지는 않으셨지만, 꾸준히 저를 보고 계시다는 건 알았어요. 조용한 분이었죠. 그분이 우리집 주소를 물으시더라고요. 가끔 페친들에게 감자, 양파 혹은 떡 같은 먹을 것이나 집에서 아이들이 입고 작아진 옷 같은 것들을 물려주시는 분들께 선물을 받는 일이 간혹 있어서 저는 이번에도 또 뭘 보내 주시려나 싶었지요. 그렇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에구, 감사합니다.' 하면서 주소를 불러드렸어요. 여자분이라서 더더욱 긴장의 고삐를 풀고...

며칠 뒤, 복덕방에서 전화가 왔어요. 또 주인이 바뀌었나,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주인이 바뀌었대요. 에구~ 또 도장 가지고 나가야겠구나~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전화를 바꿔 주시는 거예요. 며칠 전 저에게 주소를 물어보던 그 분이었어요.

세상에!

세상에!

그분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사셨대요. 훗날, 복덕방 아주머니께서 말씀해주시길, 매물 나온 것을 보고 아, 이 집 나 아는 집이라고, 세입자 누군지 안다면서 가보지 않아도 된다고 계약하자고 하셨답니다. 제가 가끔 페이스북에 우리집 예쁘게 크리스마스 트리 만든 것, 도배장판 새로한 것 등등 사진을 올리곤 했었거든요. 무엇보다도 저한테 전세금 안 올릴 테니까, 약속할 테니까 마음 편하게 살라고 하셨어요. 예전 집에서도 세입자, 어린 아이가 커서 대학 갈 때까지 살았다면서... 저는 정말 그 전화 받고 펑펑 울었지 뭐예요. 살면서 슬프거나 속상해서 운 적은 많았어도 좋아서 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 처음 그 벅찬 기쁨을 누렸답니다. 어쩌면 제 평생 행운을 거기에다가 다 쓴 것일 수도요.

이 집에서 지금 5년? 6년?째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 미안해서 이사를 해야 할 것도 같은데... 아직까지 저는 뾰족한 수는 없네요.

드라마 한 화에 몇 천만 원씩 대스타 작가는 1억씩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와, 드라마 35페이지 짜리 딱 8개만 써도 이 동네 아파트 어딘가 한 채는 살 텐데...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곤 합니다.

여하튼 이런 집이니 제가 감사하는 마음 없이는 살 수 없죠. 그리고, 이곳에서 좋은 일도 많이 있었답니다. 에세이집을 세 권이나 내고, 끊일 듯 끊일 듯하면서도 안 끊기고 꾸준히 일도 들어왔고요, 남편은 아직도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조금 벌이도 나아졌고, 아프기만 하면 경기를 하고 쓰러지던 아들은 이제 당당히 열도 이기는 튼튼이로 자랐고, 딸은 건강하게 내년에 고3이 됩니다.

집은 제게 이렇게 의미있는 공간입니다.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마무리 지을게요.

요즘 <츠바키 문구점>이라는, 일본 작가 '오가와 이토'의 책을 참 재미나게 읽었어요. 일본의 젊은 대필가(남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실제 있는 직업인지는 모르겠어요)가 문구점을 운영하면서 만나는 각양각색의 손님들과 대필가로서 자기의 삶 이야기가 소담하게 펼쳐집니다. 비록 손편지는 아니지만, 잠시 문구점의 대필가 포포짱이 된듯한 느낌이었어요.

고맙습니다.


나이 오십이나 처먹고는 아직까지 집주인의 시혜에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냐는 한심함도 지울 순 없지만, 그래도 내게는 최고의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또 한 번이라도 이렇게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샘 둑 터져 넘치기를 몹시 바란다!

어쩌다보니 어제 글부터 연속 돈타령 2연타! 죄송할 따름. 다음 글부터는 정신머리를 좀 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보낸 후 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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