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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an 04. 2024

[나의 망생일지] 살다보니, 지나고 보니

2년 전 글, 곰국 끓여봄. 

얼마 전, 우리 동네 단골 밥집에 갔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와서 단출하게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 나누다 가는 사랑방 같은 곳, 나의 다정한 ‘동굴’이기도 하다.  혼자 빨리 밥 한 그릇 먹고 나가야지 하고 앉아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남자분 두 분이 보기에도 기분 좋게 한잔하고 있다. 


“내가 산 좋아해서 다행이지. 몸이 버틴 거야. 그냥 술 먹고 지나갔으면 큰일 날뻔한 거야.”


한 아저씨가 아직 이른 저녁인데도 벌써 얼굴에 붉은 달이 둥실 떴다. 


“나한테 희망이 있고 비전이 있는 것이 중요해. 돈 오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맞는 말씀이다. 사실 지금 잃을 돈조차 없는 이들에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절박하겠지만, 앞으로 올 날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작금의 무간지옥을 저벅 저벅 걸어 지나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이 되니 말이다. 


“이혼하고 잊는 데 10년 걸렸어. 돈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족이 깨진 거야. 하루 일 마치고 집에 딱 들어가잖아. 그럼 바로 전전주까지 ‘아빠 오셨어요?’ 하면서 마루에서 놀던 애들이 없어.”


이쯤 되니, 나의 레이더망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내 앞에는 주문했던 따끈한 밥이 한 상 차려져 나왔는데도 저 아저씨의 산전수전 회고담을 안 듣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애들이 없어졌단다. 애들이... 


“급여를 내가 주기 때문에 내가 얼마 가지고 가는지는 전혀 몰라. 내가 월급을 더 받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이제는 아저씨의 사업 이야기로 전환국면을 맞이하고. 


“통장에는 만 원 남았는데, 결제할 것이 천만 원이야. 참 아찔해. 이대로 또 무너지나 했지. 그래도 마음먹고 구하려 하니까 길이 다 생기네.”


혹시나 이번에 구한 돈, 앞으로 쉼 없이 갚아 나가야 한다고 해도, 오늘만은 긴장 풀어 자축하고 내일 다시 살아나갈 일이다. 


“책 하나 나올 거야. 내가 그걸 견딘 거는…. 그래도 결국은 믿음을 잃지 않았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날 믿었어." 


그리고 계속 이어 나가는 아저씨. 


"머리털 다 빠지는 줄 알았어."


아저씨 일행이 앉은 테이블에서 좀 떨어져서 목소리만 듣고 받아 적다가 고개를 들고 아저씨를 바라봤다.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는지,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서 훤하다. 

살다가 보면 내가 손 쓸 길도 없이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주변에서 해주는 조언, 하나도 안 들린다. 특히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는 말은 왜 그렇게 얄밉던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숨 막히고 아픈데, 해결해 줄 방법이 고작 시간이라니. 
정말 '죽어야겠다' 생각하고는 마지막으로 점집에 갔다. 제 목숨 끊는 사람 발 들이게 해줄지 아닐지 알지도 못하면서 도솔천 건너기 전 인간의 말로 연유나 듣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오히려 점사를 보는 무녀님이 아직 좀 더 있어야 하는데 어떡하냐고... 조금 더 참아볼 수 있겠냐며 나한테 미안하다는 듯 절절 매며 말씀하셔서 그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더랬다. 그게 벌써 해가 바뀌었으니 13년 전 일이 되었다. 

지나고 나니 그 순간들이 모두 ‘옛일’이 되어 있는 기적이 벌어진다. 지금 나, 잘 살아있다. 오후 3시 12분, 조금 나른해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재작년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꺼내어 다시 손질하고 있다.
한때는 ‘살다 보니’, ‘지나고 나니’라는 말, 저만 편하고 내 사정 모르는 이야기 같아 기름기로 번질번질거리고 듣기 싫었는데, 오늘은 내가 모둠 세트로 한 접시에 담아서 쓰고 있으니 이미 나도 무시무시한 중년 꼰대로 성장하고 있구나!
그러나, 별 도리 없다. 그저 머리털이 다 빠질 정도로 힘들게 오늘을 버티는 모든 망생 여러분들에게 지금 글자 하나하나 힘을 실어드릴 수밖에. 망한 인생이 아닌, 희'망'과 소'망'을 가득 담은 인'생' 말이다!

재작년 이를 악 물고 일신 상의 어려움을 이겨내려 산을 타고, 수중에는 단 돈 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가 가까스로 천만 원의 돈을 구하고 차가운 생맥주로 자축하던 우리 동네 아저씨. 2024년은 어떻게 맞이하셨는지 궁금하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기쁜 소식은 우리 동네의 사랑방 밥집은 여전히 오후 3시부터 그 자리에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요일은 휴무던가...




*** 
독자 여러분들께. 
[망생일기]라는 제목으로 얼룩소에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수난이 깊습니다. 처음에는 '망한 사람 일기'인 줄 알고 잘 안 읽으시나 싶어 앞에 '드라마'를 붙여봤습니다. 
[드라망생일기]... 뭔가 드라마랑 관련이 있나 싶으셨겠죠. 그러나 '망생'이라는 단어를 모르시는 분들은 안타깝게도 제 글을 안 읽고 지나치셨을 겁니다. 그래도 이것으로 밀고 나가자 싶었습니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에 정확히 '망생일기'라고 똑같이 드라마 쓰시는 분의 웹툰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아이고~ 
이건 진짜로 안되겠다, 드라마 쓰는 사람의 작업일지 내지 성장일지야 누구나 쓸 수는 있다 치더라도 제목은 내가 본의 아니게 도둑질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니 다시 바꾸자 싶었습니다. 안 그래도 '드라망생' 이거 맘에 안 들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계속 붙들어 놓겠습니다.
[나의 망생일지] 
될 때 까지 쓰겠습니다. 이후에도 쓰겠습니다. 

가보능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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