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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an 31. 2024

수프

국도 아닌 찌개도 아닌 수프 

중학교 올라가기 전까지 우리집은 '한옥'이라고 하는 옛날집이었다. 집이 오래되다 보니 수리할 곳도 많았다. 어떤 날은 지붕이 새서 비가 오는 날은 안방에 마루에 세숫대야를 받쳐놓고 잠을 자야 때도 있었고, 다락에 우다다다다 몰려다니는 쥐들이 오줌을 대차게 싸놓는 바람에 안방 전등이 타다닥! 하고 꺼지기도 했다. 


문제의 그날은 나 일요일, 아빠가 쉬시는 날이었다. 내방으로 쓰고 있던 작은 방을 새로 도배하고 아빠가 뭔가 시멘트로 바르는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바닥 장판도 새로 깔았으니 전날 토요일이라도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고 말리는 공정이 들어갔었을 터. 새 도배지 풀냄새마저 좋았다. 

새방에서 기분 좋게 이불을 깔고 기분 좋게 하룻밤 자고 일어났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그리고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월요일이라 학교는 가야 하는데, 아파서 미치겠는 것이다.  

배가 아프다고 했더니 엄마가 '체했나?' 그러더니 그럼 밥에 물 말아서 훌훌 뜨고 가라고 했다. 엄마가 시킨 대로 물 말은 밥을 한술 떴다가 정말 분수처럼 뿜었다.

어떻게 저떻게 학교는 갔다. 겨울이라 교실은 연통 난로를 때고 있었다. 


인터넷 서칭에서 발견

중장년 층에 속하는 분들께서는 기억하실 것이다. 이 연통 난로가 가까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완전 뜨거워 죽고, 멀리 있는 아이들에게는 얼어 죽는 신비의 난로라는 것을. 

하필이면 나는 '뜨거워 죽는 zone'에 속해 있었다. 난로의 열기가 메스꺼운 나의 속을 더 요동치게 만들었다. 

두통과 복통을 도저히 못 참겠어서 책상 위에 힘없이 풀썩 엎드렸다. 토할 것 같아서 잠도 안 왔다. 

갑자기 친구들이 웅성거리며 내 옆에 몰려들었다. 


- 야, 너 이름 불렀어. 교무실로 상 타러 오래. 


아마도 얼굴이 노래져서 갔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 훈화는 늘 그렇듯, 예외 없이 길게 길게 늘어졌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보다 교무실 난로의 화력은 서너 배는 강력하다. 교장실은 모르긴 몰라도 일반 교실의 열 배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열기를 참아내며 이를 악 물고 서 있었다. 앞에 나가서 상이나 제대로 받았을까. 분명히 글짓기 상인 것은 확실한데, 그날은 수상의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 쿵! 

갑자기 눈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6학년 오빠가 놀라서 뒤돌아보는 얼굴만 번쩍! 보였던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양호실(지금의 보건실을 그때는 양호실이라고 불렀다)에서 기절해서 한참을 누워있었다고 했다. 나를 졸도시킨 원인은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애들 학교에서 졸도 한 번 하면 슈퍼 스타 되는 건 시간문제다. 다리 부러져서 깁스만 하고 와도 단 하루 만에 인싸 등극. 뿐이냐. 릴레이 경주 나가서 넘어지기만 해도 그 친구는 영웅이다. 일등 하지 않아도 영웅이다. 우리들의 걸려 자빠진 영웅. 

나는 그날부터 '졸도'로 유명해졌다. 5학년 여자아이에게 '기절' 혹은 '졸도'란 너무나 로맨틱하고 가녀린 베르사유의 장미 같은 이미지를 얹어주기에 충분했다. 아아~! 오죽했으면 중세 시대 귀족들에게는 저택에 '기절방'이 있었겠는가. 


서론, 잡설이 길었다. 

진작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수프다. 

나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진 날부터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거의 일주일 간을 엄마가 만들어주신 '오뚜기스프'에 밥을 말은 것만 입에 댔다. 

내 기억에 가득 남은 위로의 음식, 수프는 오뚜기'스'프다. 꼭 '스'프여야만 한다. '샐러드'와 '사라다'가 전혀 다른 음식인 것과도 같이...

하지만,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위로의 음식', 아플 때 먹는 음식이라고 하면 죽을 떠올린다. 외국인들에게는 영혼의 닭고기 수프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고 어떤 나라는 굴라쉬 같은 스튜가 사람들의 추억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나에게 수프는 직관적으로 '오뚜기 스프'다. 경양식집에 가면 양복 조끼를 깨끗하게 입은 분이 '밥으로 하시겠습니까, 빵으로 하시겠습니까'를 물으면서 내어주시는 바로 그 노오랗고 걸쭉한 수프 말이다. 

돈까스, 비후까스 좀 꽤나 썰어 본 언니 오빠들은 테이블 옆에 놓인 능숙하게 양념통에서 후추통을 꺼내 솔솔 뿌려댔다. 그리고, 숟가락을 안에서 밖으로 노를 저어 먹었다지. (그냥 평소에 국 떠먹는 것처럼 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촌스럽게 귀엽고 우스운 장면이다!)  




사실 우리나라 같이 음식을 뜨겁게 해서 먹는 나라도 없다. 오죽하면 찌개나 전골은 음식점에서 소위 '부르스타'라고 불리는 작은 간이 가스레인지를 올려놓고 보글보글 끓여가면서 먹을까. 먹다가 조금만 미지근해져도 사람들은 '에이~ 맛없어졌다'라면서 다시 끓여달라고 요청한다. 

해장국집에 가면 음식의 온도는 100도씨 이상으로 치솟는다. 뺀찌 같이 생긴 뚝배기 집는 집게도 우리나라 밖에 없다. 왜냐고? 이렇게 국물 음식을 펄펄 끓여 먹는 민족이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고, 뚝배기라는 붉은 진흙으로 빚어 구운 식기 또한 우리나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편백나무 찜기나 중국의 대나문 만두찜기를 떠올려보시길. 한국 음식 특유의 초고온의 조리법이 단번에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입천장 한 번 안 까져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한 면에서 뭉근하게 끓인 수프는 한국인들에게는 어중간한 온도다. 수프를 하나의 요리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모양새이다. 

수프 전문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웃 일본에 비하면 현저히 적다. 일본의 잔잔한 음식 드라마 '빵과 수프와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에 나오는 가게에는 그날그날 다른 샌드위치와 수프를 만들어서 손님에게 낸다. 수십 가지의 수프를 메뉴로 준비한 수프 전문점도 있다.  

한국에서 수프란 여전히 샐러드나 샌드위치의 받침 음식으로 자리한다. 다른 음식에 곁들여서 나오는 건 괜찮지만, 따로 돈을 지불할 음식은 아니라고 여기는 듯. 마치 군만두가 한국 땅 밟고 '서비스'로 고생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수프의 위상은 확실히 애매하다. 각종 야채와 고기를 푹 우려낸 국물 음식을 수프로 총칭한다면, 한식에서 수프를 대신할만한 것은 이미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가루 수프의 절대적인 지배력도 한몫한다. 수프를 이야기할 때 여전히 돈가스에 앞서 나오는 노르스름한 크림수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에서 이만큼 진화가 안된 서양 음식도 드물다."

(한국일보. 2018.02.21. ‘따끈’과 ‘뜨끈’ 사이… 시린 몸 녹이는 수프 한 그릇)



이십 대 중반,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식탁>이라는 요리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요리법이란 없다. 그저 어떤 싱그러운 식재료를 넣어서 간단하게 오일, 소금, 견과류 정도와 곁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이다.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부부의 철저한 자연주의 삶의 방식이 이십 대 때에는 좀 유난스러워 보였다. 

사실 지금도 이 요리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스콧과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강한 거부감이 일곤 한다. 남편인 스콧 니어링과 나 헬렌은 함께 이런 이런 것들을 먹기 때문에, 혹은 같은 식생활과 음식에 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反 요리책'을 조심스럽게 썼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말이다... 

같은 식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몹시 다행이고 편안한 일이기는 한데 부부 사이에 이렇게 개성을 포기하고 식성까지 한 데로 묶여서야 되겠나 하는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생각으로 잠시 주춤하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프는 참 재미나다. 


"수프는 위로를 주는 음식이다. 만들기 쉽고 소화하기 쉬워서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환영받을 만하다. 남은 재료를 이것저것 섞어 아주 적은 비요으로 준비할 수 있는 음식이 수프다. 쓰고 남은 재료와 야채 우린 물만 있으면 행복한 식탁을 마련할 수 있다.

...(중략)

나는 수프를 많이 끓이면서 1/3은 재료, 1/3은 있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솜씨, 1/3은 행운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식탁> p145


"계절마다 어울리는 다양한 수프가 있다. 적은 수입으로 쾌적하게 사는 법을 아는 시골 가정에서는 일주일에 서너 차례 분위기에 맞게 수프를 만들고, 상황에 따라 다른 음식을 가볍게 곁들여 먹는다." 

- 익명, <적은 돈으로 사는 법> 1745


"내 생각에 훌륭한 수프는 모두 다진 양파를 기름에 볶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다. 갈색이 도는 수프를 만들려면 기름에 양파나 마늘을 볶고, 다진 야채와 허브를 넣어 기름이 흡수되고 야채가 갈색이 날 때까지 볶는다. 거기에 끓는 물을(야채 분량의 세 배쯤) 부으면 수프가 된다." 

- 같은 책, p151


수프의 역할이 이렇게 소박한 식생활을 담당할 진데, 우리나라의 국이나 찌개를 생각하면 그만큼 훌륭한 냉파(냉장고 파 먹기) 요리는 없을 것이다. 

그저 국물의 베이스가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진 맑은 국물인지, 고추장 혹은 된장, 그리고, 김치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그 안에 시금치, 무, 감자, 호박, 파, 양파(위에서 볶은 양파의 풍미를 강조, 또 강조했다) 등의 채소와 돼지고기, 소고기, 두부 등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면서 맛을 변주한다. 

게다가 우리는 특히 김치를 베이스로 요리를 하는 경우 면을 넣어 한 끼 식사로 든든히 먹는다! 물론 밥을 말아먹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물 문화에 빠질 수 없는 재미이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국물에 밥을 말아먹기를 좋아는 지 알 수 있냐면, 어린 시절에는 수프에도 밥을 말아먹었다. 토마토소스가 베이스인 스튜를 한 솥 끓여놓는 경우에도 하이라이스처럼 밥 위에 부어 먹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검색을 해보니 크림수프에 밥 말아먹기는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은 '수프밥'... 좋아하시는지?


점심을 먹기 전까지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은 나도 이 새벽, 갑자기 오뚜기 수프를 꺼내서 물에 가루를 풀고 싶다. 그리고 수프에 찬밥을 말고 한참 잘 익은 배추김치를 썰어서 수프밥 위에다가 척 얹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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