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린 간장밥
버터 말고 마가린.
지금 생각하면 어린이집도 없고, 유치원도 일곱 살이나 되어야 갈 수 있는 시절에는 엄마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키웠나 상상하기가 힘들다.
세기말 1999년, 2000년만 해도 갓난아기를 맡길 데가 없어서 아무 어린이집이나 이불 둘둘 감싸 안고 들어가서 봐달라고 하기도 했었다. 앞뒤 대책도 없이 대학원은 등록해 놨지, 수업은 하루종일 꽉 찼는데 아기 봐줄 사람은 없지... 학교 가는 날 아침까지도 대책도 하나도 없었던 이십 대의 내 얘기다.
나에게는 두 살 차이 남동생이 한 명 있다.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나를 낳고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셨다고 한다. 지금의 나는, 그리고 그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수백 번 듣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에도 왜 하던 일을, 선생님이라는 전문적인 분야의 직업을 엄마가 그만두어야 했을까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짐작만 한다.
하긴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12살 차이 나던 언니도 대학을 졸업하고 '신부 수업'을 하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신부 수업이란... 조금은 잔인하게 잘라 이야기하면 결혼을 하기 전의 여자 백수다.
내가 이렇게 2-30년 전 이야기를 지루하게 꺼내는 이유는 일을 그만두고 우리 남매를 키우던 엄마의 하루가 생각이 나서다.
출근하시는 아빠가 드실 아침을 차리고(아빠가 아침 밥상을 받으셨을 때는 나는 늘 아빠 뒤 이불에 파묻혀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출근을 하시면 청소를 시작했다. 그때는 청소기나 있었나. 엄마가 방빗자루를 들고 무릎 꿇고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비질을 하면 우리들은 그걸 피해서 쪼르르 도망 다녔다.
그리고 오전에 마당 빨랫가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손빨래를 했다. 거의 매일 빨래를 했다. 83년, 84년에 하얀 금성 백조 세탁기(백색 가전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에서!)를 구입하기 전까지 손으로 빨래를 다 했다. 그리고, 장독대 아래의 광(창고의 옛말이다)에서 마늘을 꺼내기도 하고, 주황색 바가지에 소금을 퍼서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가끔 엄마가 소스라치게 아악! 소리를 치는 건 시커먼 쥐가 엄마 발등을 밟고 지나가 서다. 그 녀석은 내 발등도 가끔 밟았던 적이 있다.
늘 엄마는 쭈그리고 앉아 일을 했었다. 빨래도, 청소도...
"점심 먹어라!"
엄마가 부르면 등나무로 꽉 뒤덮여 여름에도 햇볕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던 마당에서 놀던 우리는 후닥닥 안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때는 밥 먹기 전, 밖에서 놀다 들어왔으니까 손 닦으라는 말도 안 했다. 그런 위생 개념이 어딨었나. 목욕도 일 주에 한 번, 목욕탕 가서나 하고 오는 판에...
채광이 몹시 좋았던 옛집은 궂은날이 아니라면 굉장히 환했다. 아마 마당 한가운데가 등나무 덩굴 때문에 너무 어두워서 상대적으로 환하게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안방 창문을 열면 처마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방으로 키가 작은 엄마가 또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려서 점심 밥상을 가지고 들어온다.
먹성이 좋았던 우리 남매는 엄마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면 되게 좋아했다.
동네에 가끔 밥상 칠하는 아저씨가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걸 옻칠이라고 하는 건지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그 칠 냄새하고 엄마가 지은 하얀 밥 냄새하고 묘하게 얽혀서 지금도 설풋 그 생각하면 뜨거운 흰쌀밥 특유의 단맛이 이거려니 싶다. 어쩌면 내 머릿속에는 흰쌀밥 냄새란 아마도 그 빨간 칠을 한 밥상 내하고 함께 뒤섞여서 입력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김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 공기를 잡고 엄마가 마가린 뚜껑을 연다. 그리고 딱딱한 노란 마가린을 숟가락으로 도르르 말리게 푼다. 그리고 아직도 뜨거운 밥 안에 묻는다. 숟가락으로 주변의 흰밥을 마가린 묻은 곳 위에 야무지게 얹어서 단단히 덮는다. 그럼 그 안에서 마가린은 흐물흐물 녹는다.
엄마가 숟가락 잡는 폼이 좀 특이해서 그 손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엄마가 숟가락 잡는 모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손을 잔뜩 오그라뜨려서 잡는 모습이 안 예뻐 보였다.
우리 집은 지금도 식탁에 간장 종지가 늘 있다. 나 어렸을 때도 간장을 찍어먹을 일이 있든 없든 밥상 위에 종지가 올라와 있었다. 사실 이 종지는 식구들 숟가락, 젓가락이 수 번 왔다 갔다 하며 '만남의 광장'이 되었을 터라 위생의 측면으로 봐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겠으나, 여하튼 이 종지는 우리 친정집 식탁을 늘 지키고 있다.
엄마가 마가린 매복을 마친 뒤 밥풀이 잔뜩 묻은 그 숟가락으로 간장을 한두 숟가락 뜬다.
그리고 슥슥 비빈다. 간장에 깨소금이라도 뿌려져 있었을까. 아마도...
다른 집은 이 위에 계란 후라이를 올려서 뿌셔 뿌셔 비벼 먹는다고도 하는데, 기억에는 없다. 엄마의 레시피에는 마가린 간장밥에 계란을 얹는 정도의 변주는 할 정도의 감각은 없었다. 그래도 내게는 이 마가린 간장밥이 너무 맛있었다. 한 숟가락 탁 떠서 김치 올려 먹으면 정말 그 맛이 일품이다.
다른 나라도 이런 밥이 있을까. 찾아보면 늘 간장 계란 비빔밥만 보인다. 일본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해주는 밥인가 보다. 이명박이 계란밥을 그렇게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궁금해서 딱 한 번 해 먹어 보고는 그다지 해 먹고 싶지가 않다. 한 인간이 끼치는 영향력이 이리도 크다.
이 일본식 아기들 전용 비빔밥의 포인트는 흰자를 걷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달걀 흰자가 들어가면 비린내가 심하다. 하지만, 노른자만 간장과 함께 비볐을 때 그 맛은 일품. 달걀이 싱싱하면 싱싱할수록 노른자 터뜨리기도 조금 힘들 뿐, 너무나 고소하고 맛있다.
지금도 아주 가끔 마가린 간장밥을 비벼 먹는다. 버터 말고 마가린 특유의 '기계 맛?'이 간장하고 버무려져서 나의 어린 시절을 훅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엄마의 젊은 시절도... 하루종일 두 아이 돌보느라 여간 피곤하지 않았을 엄마의 고단한 점심때가...
엄마는 늘 피곤해있었다.
좀 전 아들이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엄마, 나한테 그런 표정 짓지 마요. 계속 졸려버려요. 피곤해버려요."
오늘 오전, 기획안 마감을 하고 정말 진이 다 빠져 있는 데다가 방학인 딸이 떡국을 해달라고 하고, 지난주 주문한 굴은 그냥 둬서는 안 되겠고, 그런데 굴떡국은 싫다고 하고...
이런저런 잔일들이 자잘하게 많았던지라 저녁 식사까지 마친 오후 7시 반 넘어서는 정말 너무 피곤했다.
그 피곤한 모습, 약간은 신경질적인 모습이 아들의 눈에 바로 보인 것이다. 열한 살인데도 완벽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아들은 나한테 '계속 졸려버려요, 피곤해버려요'란다. 졸려도, 피곤해도 좀 참아요, 이 소리다.
갑자기 마가린 간장밥을 비벼주던 피곤한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숟가락 꽉 쥔 손도...
화요일에는 식재료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데, 사실 글 서랍에 '팥죽', '토란국', '굴밥'까지 꽉 차 있는데 엄마 생각이 나서 그냥 마가린 간장밥 새로 지었다.
별 재미는 없겠지만, 담백하게 읽고 가시길.
아 참, 마가린에 얽힌 정말 쪽팔린 에피소드 하나 보내고 마무리한다.
십 대 때, 잠깐 외국에 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외국어를 배우기 최적인 상태였던 것이 엄마, 아빠 없이 나 혼자 영어를 쓰는 사람들 집에 나 혼자 살고 있었던 것. 게다가 마을에 한국인이 없었다. 하루종일 한국말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나간 적도 많았다.
내가 묵었던 집은 지방이 억울하게스리, 버터는 살이 찐다고 생각을 해서(아저씨가 굉장히 비만이었음) 대신 마가린을 썼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는 롤빵에 바를 마가린을 좀 달라고 했다.
"패스 미 더 마가린 플리즈."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왓?
"마가린..."
점점 쫄아가는 내 마음.
"마......과.......린느!"
오우~ 마져린! 오케이, 히어, 마져린....
기억하자. 마가린은 영어로 발음하자면, 마져린이다.
심지어 이 어르신분들은 영국에서 이민 오신 분들이라 마져린이지, 쌩 미국 발음으로 하자면 매쥬린일지... 난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