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자국, 엄마를 알아낸 시간
"다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랑 만나서 술을 한잔 하거나 차 한잔을 마셔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요. 사진도 올리지 말라고 그래요. 꼭꼭 숨겨요. 나랑 만나는 것이 창피한 걸까요?"
어제저녁, 상담을 받고 왔다. 그동안 얼마나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이 감정이 뭔지 잘 몰라서 그냥 덮고 살아왔는지 상담을 받으면 받을수록 느낀다. 감정이란 그저 덮고, 참으면 되는 것인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늘 죄책감 비슷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그런데, 그건 '참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무조건 참는 것이 미덕도, 지혜도 아니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기분이 조금은 찜찜하다'는 표현을 했는데, 잠깐! 하고 선생님은 그것에 포인트를 잡으셨다. 그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당연히 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숨기려는, 굳이 말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sns에 올리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어제, 그제 누구와 함께 재미난 시간을 보냈는지 일일이 다 밝힐 생각도 없다.
그래도 가끔씩 "너, 이거 페북에 올리려고 하지?", "인스타에 올릴 거지? 그러지 마.", "넌 미주알고주알 일상 다 올려서 그거 안 좋아."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오케이, 여기까지는 좋다. 다른 이들의 부탁이고, 바라는 바이니 당연히 철저하게 지킨다.
그런데, 내가 '찜찜해지는' 지점은 이곳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하고의 멋진 시간은 다 올리면서 나와 함께 한 일은 그냥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것, 아예 나와의 시간은 없던 척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봤을 때이다.
그런데, 이 일을 정당하게 기분 나빠해야 할지, 아니면 참고 지나가야 하는 건지,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인지 몰라서 이리 '찜찜한 상태'로 남은 것이다.
아스퍼거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을 어떻게 단도리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냥 남들에게 맞춰서 휩쓸려가면서도 분명히 내 안의 '감정'의 씨앗만은 살아있기에 예상하지 못하는 시점에 분노가 터지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운이 좋을 때는 여러 상황에 흡족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정정당당하게 느껴도 되는 감정인지 아닌지는 잘 판단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속상해하기만 한다.
그러다가 잊으면 잊는 것이고, 계속 앙금이 남아도 아닌 척하면서 그 앙금을 없애려고 애를 쓰며 살다가 잊혀지고... 역대급 큰 감정은 덮어버리려고 어떻게든 노력하다가 욱 하고 터져서 화산과도 같이 분출해버리기도 한다. 이것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내 감정 다루는 방법이었다.
이에 선생님은 시원하게 먼저 결론을 갈라주셨다.
'내가 유령인가? 나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은 뭐가 되는 거지?' 하고 당당히 기분 나빠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나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나를 충분히 보듬어주라고.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니까. 나의 왜곡된 생각이 아니니까 말이다.
자, 그리고 다음 단계.
왜 사람들은 나와 만난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자랑스럽게, 혹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기분 나빠! 하고 끝나면 인간이 숙성할 수 없다. 마치 시험을 보고 난 뒤 틀린 문제들을 모아 오답 노트들을 만들 듯 되도록 정답에 가까운 길을 찾고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
그 사람들을 위하여? 아니, 제일 먼저 나를 위하여. 그리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떤 감정인지도 모른 채 어리바리하게 속이 상해서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안고 살지 않기 위하여.
선생님은 '평판'과 '빌미'라는 단어를 이야기하셨다.
그동안 나에게 가끔 터져 나오는 부모님에 대한 글, 완전히 불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글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어린 시절도 대입해 보며 동병상련의 위로를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편안한 글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글로 '자학'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신다. 끝도 없이 부들부들 거리는 분노, 나는 꼭 부모한테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완벽주의' 등등이 똘똘 뭉쳐진 글을 읽고, 그전에 이미 나의 특성을 파악하신 선생님은 마음이 아팠다고 하셨다.
그 글이 오랫동안 쌓아놓은 나의 좋은 의도, 선한 마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평판,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 평판을 와르르 무너뜨려 내리니까.
더 악독한 것은 사람들에게 나를 짓밟을 빌미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내 글 하나로 평판이 무너지고, 빌미를 준다는 사실에 대한 그동안의 내 머릿속 생각 구조를 이야기해 보겠다.
설마 이 글 하나로 나를 무시하겠어? 나를 하찮게 보겠어? 좋은 사람이라면 한 사람이 괴로워서 쓴 글 하나로 왔다 갔다 하지는 않을 거야. 빈틈을 잡고 나를 그렇게 찍어 누르지는 않을 거야.
세상에는 좋은 이들보다 나쁜 놈들이 훨씬 많고, 내 편보다 남의 편이 득실득실거린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아스퍼거인인 나의 두터운 '자기중심적인 사고', 가장 대표적인 특성인 '눈치 없음'이다.
(이것도 선생님께 한 두 달, 열심히 배워서 겨우 알게 된 것이다. 다행이다!)
자, 다시 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돌아가본다.
그 친구들은 내가 TPO에 맞지 않는 눈치 없는 행동을 가끔 한다는 것을 이미 파악했다. 그리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튀어나올지 모르고, 심지어는 황서미와 함께 했다는 것 자체가 하찮아 보이거나, 다른 이들이 실눈을 뜨고 볼 모르니 자기 관리 차원에서 사전에 예방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아야 한다.
당연히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는 이들은 나를 좋아할 것이다. 미운 사람, 싫은 사람과 그렇게 시간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평판'이라는 것은 '나 오늘 황서미랑 같이 만났다!'를 자랑스레 꺼내어 놓고 싶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는 어떤 완장을 찬 사람들은 나에게 충고를 한다는 핑계로 전화해서 자기들의 감정을 모두 쏟아놓고 가버린다. 이게 바로 '빌미'를 준 것이다. 그 낮은 평판이... 나는 이런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상담 중에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오래오래 나 혼자만 섭섭했던 것들이 슬슬 이해됐다.
그리고, 중요한 것, 정당하게 기분 나빠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아직은 그게 안된다.
아, 참, 그런데 나랑 같은 아스퍼거 친구들 중에 멋진 친구들이 많다!
일론 머스크, 빌 게이츠, 아인슈타인,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까지 다 내 친구다!
다른 이들보다 예민해서 영문도 모르고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가 많지만, 자기주장이 다 맞는 줄 알고 밀어붙이다가 번번이 나가 자빠지기도 하지만, 번득이는 상상력으로 뭔가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야 하는 일을 할 때에는 독특한 방향으로 엉뚱한 생각을 해서 좋은 것 같다.
선물 같은 내 자폐 스펙트럼. 하나하나의 감정, 한 가닥 한 가닥 천천히 알아 나갈 것이다. 그냥 참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눙치지 않고.
8년 전, 우리 아들이 중증 자폐 판정을 받고 열한 살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나도 자폐 스펙트럼의 일종인 '아스퍼거'라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나는 언어 장애가 없고, 지능으로 아마 이쪽 징후를 덮어버린 지라(?)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주 중증의 뇌성마비나 정말 한시도 입도 못 다물고 있던 발달장애 친구가 아니면 그냥 '까부는 애', '나대는 애' 혹은 '조용한 애' 정도로만 알았지 이런 장애 스펙트럼의 일종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으니까.
내 아들은 자폐 스펙트럼 안에 명백히 들어와 있고, ADHD도 있으며, 어떠한 연유인 지는 모르겠지만 언어장애까지 심해서 나는 굉장히 세심하게 온 촉수를 세워 '상상 대화'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엄마인 내가 비슷한 사고방식의 비정형 인간이었던 지라 아이가 내뱉은 단어 하나 가지고도 말이 잘 통했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리 집에서 아이를 대할 때 가장 예민하고(이 말인즉슨, 제일 힘들어하고) 통역을 제일 잘하는 가족이다. 게다가 아이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흘러가는지, 저 먼 과거의 일까지 용케 끄집어와서 하고 싶었던 말을 알아맞히는 것은 일품이다!
자, 엄마인 나는 이렇게 아이의 상태를 알고, 탠트럼(자빠져서 미친 듯이 끝없이 울어대고 뻗대는 강박현상)이 왔을 때의 매뉴얼까지 정확하게 안다. 물론, 굉장히 힘들다. 참고, 참고, 또 참고... 게다가 한 번 말을 안 듣기 시작하면 얘는 언어가 제대로 인식이 안 되는지라 더욱더 심각한 불통 상태가 된다. 너무너무 힘들다.
게다가 나는 청각이 몹시 예민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예민한 탓에 아이가 하루종일 지속적으로 내는 돌고래 소리, 반복적으로 흉내 내는 꽥꽥 소리를 굉장히 못 견딘다. 그것도 아이를 키울 때 커다란 스트레스 요인 중에 하나였다.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아이가 분명히 이런 식으로 나와 소통을 하고 싶............
이러다가 뻥!! 터졌다. 한 번씩...
나도 사람이니까.
그런데, 참 독특한 딸인 나, 쉽지 않았을 자식인 아스퍼거 증후군의 나를 키우면서 우리 엄마는 어땠을까.
위에 내가 썼던 것처럼 참고, 참고, 또 참았을 것이다. 이 부분, 나는 키우기 쉬운 자식이 아니었을 것은 명명백백하다. 나는 엄마가 나를 키우면서 겪었을 이 영역을 전혀 모른다.
엄마는 '악인'이 아니다. 다만 너무 힘들고, 어느 때에는 자기 분을 참지 못해서 욕설도 내뱉고, 나를 때리기도 했지만, 나는 뚝 잘라서 '나를 때렸다', '욕을 했다'라는 부분만 확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엄마에게 무참하게 맞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전 단계, 내가 어떤 어떤 증후군의 아이라는 상태도 모르고, 매뉴얼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시절은 어긋나는 행동, 과한 행동은 체벌로 누르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자식이기 때문에 당연히 찍어 눌러 '진정을 시켰어야' 했을 것이다.
엄마도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손도 덜 가고, 말도 요령 있게 잘 듣고, 공부도 잘하는 영재반, 전교 1등 아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더 예쁠 수밖에 없다. 둘을 아무리 비교해 봐도 딸은 너무 고집불통이고, 남들에게 내세울 것도 없다. 세상에, 나중에 크고 나니까 떡 하니 이혼을 하고 돌아왔다. 맙소사! 그리고 또 하고 왔다. 또또, 하고 왔다. 또또또, 하고 왔다. 그러니 더더욱 나를 숨겼다. 이것도 팩트다.
나를 숨기고, 창피해하는 엄마가 너무 섭섭했다. 이것 또한 팩트다.
나는 이런 엄마를 악마로 생각한다. 생각해 왔다. 지금은 이것을 점점 과거형으로 돌리는 과정이다.
'생각했다'로...
아직은 엄마한테 '나 키우느라 많이 힘들었지?'라는 말이 안 나온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을,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천방지축인 딸, 이해가 하나도 가지 않는 딸을 키우느라 힘들었을 엄마를 여전히 이해하고 있는 중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은 같다.
내가 먼저 엄마한테 말을 건네야, 엄마도 나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
이렇게 엄마와 나의 관계, 그리고 나와 내 자식의 관계를 생각하니 '파동'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엄마 한 방울, 고요한 물에 떨어지고, 내 한 방울 또 떨어지고, 그리고 내 아이들 방울방울들 똑. 똑. 떨어져 파동을 이루는... 언제 어디에 가서 부딪혀도 좋고, 겹쳐도 좋고, 넘실넘실 파도 밀려가서 더 큰 원을 이루면 더더욱 좋겠다.
나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
첫째로 그것이 목적론적인 정의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행위가 지향하려고 하는 목표나 목적의 관에서의 정의라 하겠는데, 이 경우 그 목표란 영적 성장이다.
(중략)
둘째로는 내가 정의한 사랑이 신기한 순환적 과정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진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기 한계를 성공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전보다 더 큰 존재로 성장할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행위가 타의의 성장을 목적으로 할 때도 역시 그 또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진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셋째로 사랑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정의는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나도 인간이고 다른 사람도 인간이므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 - M.스캇 펙 지음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너무나 깔끔하게 갈무리해 준 책의 구절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갈 길이 멀지만, 옳은 길을 찾은 것은 같아서 다행이다. 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