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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황섬의 키친 테이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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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황섬 May 07. 2024

손의 기억

악기에게 실연을 당했습니다만

아주아주 옛날, 사립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엄마 덕분에 다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엄마가 직접, 엄하게 가르쳐주셨다.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열심히든 딩가딩가든 여하튼 학원 문턱을 드나들었던 이들에게는 ‘바이엘’이라는 악보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나 또한 그렇다. 도레도레도 도레미도 미레도미…… 바이엘 첫 장에는 이 세 멜로디의 음표가 커다란 검은 단추처럼 딱 박혀있었다.

악기나 운동이나 무한 반복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어느 정도 숙련된 테크닉이 손과 몸에 익을 때까지 그 지겨워 죽겠는 ‘사과'를 그려야 한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한 곡을 끝까지 치면 선생님이 나눠주신, 옆으로 기다란 공책에 사과를 그렸다. 죽어라 그렸다. 한 번 쳤는데, 두 개 그릴 때도 있었다. 대충 시간 맞춰서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개수로 사과를 그렸다.

그러다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떤 계기로 머리가 베토벤같이 헝클어진 괴짜 여자 선생님을 만났다. 제도권의 교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연주하는 것을 보고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었다. 중 2 여름 방학이었다. 그 선생님의 권유로 겨울방학부터 오르간으로 전공을 바꿔서 연습했다. 오르간 전공이라고 해도 피아노도 연습은 엄청 많이 해야 한다. 나는 피아노하고 오르간을 오가면서 하루에 대여섯 시간 넘게 연습했다. 선생님은 연습은 집에서 하고 와서 레슨만 받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괴짜가 괜히 괴짜가 아니다. 아침 9시에 쿰쿰한 악보 냄새가 진동하는 선생님 음악실로 와서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을 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때가 되면 밥까지 해서 먹이면서 연습하라고 하셨다. 방학 내내 놀지도 못하고 꽉 막힌 연습실에서 하루종일 있는 데도 좋았다. 오르간 발 페달을 밟을 때 신는, 굽 높은 오르간 구두를 신고 있는 내 모습마저 너무 멋지게 느껴졌다! 성당에 미사가 없을 때 수녀님께 허락 몰래 받고 성당에 들어가서 오르간 뚜껑을 열었다. 오르간에서 나는 전기 전선과 악기를 감싼 나무가 묘하게 섞인 그 냄새가 너무 좋았다!

이렇게 나는 우연히 서울 수유리 촌 바닥에서 선생님을 만났고, 낭랑 십오 세 무렵, 오르간 건반 떼어 치기, 이어 치기 기술을 익혔다. 게다가 발 페달까지! 스승은 무림의 고수!

이 짝퉁 베토벤 선생님은 무조건 바흐 인벤션부터 평균율이니 뭐니 가리지 않고 전 곡을 다 녹음했다. 녹음테이프만 수십 개가 쌓였다. 바흐는 사실 악기를 배우는 어린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작곡가가 아니다. 밋밋하고, 지루하고, 졸리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무조건 바흐 전곡 녹음을 고집하셨다. 경상도 사투리가 대단했던 이 선생님의 정체는 나도 잘 모르겠다. 모습은 마치 영국 드라마 어딘가쯤에서 보았던 몰락한 덩치 크고 다크한 여자 귀족 정도? 늘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엄한 빨간 머리 앤의 마릴라 아주머니와도 같은 느낌, 아니 그보다 여자 버전의 지킬 박사 같은 느낌 정도였다. 어떻게 이 선생님을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미스테리하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내게 오래도록, 지금까지도 바흐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해 주신 분이다. 모습은 베토벤 같이 생기셔서…

아이러니하게도 내 음악 인생의 가장 큰 빌런은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딸인 내가 재능도 없는데 음악 하면서 돈 쪽쪽 빨아가지 말라고 대놓고 이야기했다. 가끔은 '돈 빨아먹는 기계'라고도 했다. 아무래도 따로 돈 크게 들지 않는 공부만 하기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40년대에 태어난 부모님 세대가 다 그렇듯 공부만 잘하면 인생 성공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오르간이 더 재밌었다. 인터넷도 없던 1980년대 후반, 나는 직감적으로 이 선생님 밑에서 계속 배우면 '세계적인' 음악가가 될 수 없겠다는 계산을 했다. 그리고 '김**' 오르가니스트의 연주를 명동성당에서 듣고 뒤로 직접 찾아가서 가르쳐 달라고까지 했었다. 어린 중학생이 어디에서 그 패기가 솟아났을까. 그리고 거짓말같이 이 연주자가 이대 음대의 오르간을 가르치는 교수를 소개해주었다.

겨울비가 오던 어느 날, 우리 엄마 아빠랑 함께 교수님을 만나 연주하던 자리. 엄마는 이 교수님이 너 오르간, 피아노 치는 것 보고 아니라고 하면 끝내라고, 접으라고 했다. 나는 오케이! 알겠다! 십오 년 내 인생 내내 방해만 하는 엄마 입을 근사한 연주로 막아버리고 싶었다. 음악 하고 싶다, 넌 안 된다, 하지 마라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나름 내 인생을 걸고 이 이대 교수를 만나러 갔다. 원래 드라마는 이 장면에서 교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학생의 연주를 침묵하며 듣고 있어야 한다. 한 곡 더 해보라고 하면서 내내 아무 말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연주를 마친 중학생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부모도 교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그 긴장 타는 순간, 교수가 입을 연다. “이 아이, 제가 한번 가르쳐보겠습니다. 후회 없도록 가르쳐 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교수는 중학교 3학년이던 내 연주에 아주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지금 누구한테 오르간 배우냐고 묻는데, 나는 더듬더듬 베토벤 머리 선생님 이야기를 했다.

"아아, 그 캐나다에서 온 그 여자? 약간 이상하죠?"

그냥 거기서 끝났다. 아마 그 선생님이 좀 오르간 계의 이단아였던 것 같다. 이대 교수의 콧방귀에 이어 우리 엄마 얼굴에서 안도와 쪽팔림의 묘한 표정을 봤다. 그리고 '그러면 그렇지, 네가 무슨 오르간이야?' 이 표정도…. 화가 났다. 어른 한 명의 말 한마디로 내 음악 인생을 쫑낼 수 있다니. 이렇게 허망하게…

그 뒤로 피아노, 오르간 연습을 그만두었다. 애인에게 실연당한 마음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집에 피아노가 있었지만, 몇 년은 피아노 방에만 들어가면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내 손은 화석같이 굳어갔다. 물론 20대 후반까지 성당 새벽 미사 반주를 꾸준하게 하긴 했지만… 내 손을 보면 가끔 엄마한테 화가 난다. 왜 그렇게 내 음악을 무시했을까. 엄마는 내게 조수미처럼 전 세계 1등을 하라 했었다. 그걸 보여주면 음악 시켜주겠다고 말이다. 나와 같이 중년이 된 우리 엄마, 아빠들아 돌아봐라. 내 아이 전 세계 1등 하는 애들 몇 명이나 되냐. 그 '1등'에 갇혀서 내 손은 굳었다. 그 뒤로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여기저기 이사를 전전하며 살았지만 피아노나 오르간을 들여놓을 만한 집 크기도 아니어서 악기와는 더욱 점점 멀어졌다. 차라리 바이올린이나 기타였다면 계속했을까?

내 본명은 '하나'다. 무조건 1등 하라고 '하나', 엄마가 지은 이름이다. 너무나 엄마스러운 이름이라 허탈하게 웃음이 난다. 황하나. 이 이름이 싫어서 필명을 꼭 쓴다. 황서미. 황섬. 그 섬에 가고 싶다. 이번 주 지나고 다음 주 수영 대회 나가는 열한 살 어린 아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 아이에게 지금 어떤 엄마일까. 자식 일에 욕심내지 말자며 늘 마음을 가다듬는다. 1등 안 해도 된다. 그런데도 자꾸 잔소리가 나간다. 접영 할 때, 자유형 할 때 무릎 많이 접어서 킥하지 말라, 숨 쉴 때 머리 밖으로 빼지 말라고 등등… 입이 근질근질하다, 정말.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화들짝 내 어린 시절의 엄마가 생각이 나곤 한다. 나는 아들 딱 보니까 조금만 더 하면 세계 1등까지는 아니어도 잔잔바리 대회라도 1등 먹을 것 같아서 돈 들여 시키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어 뵈니까 신이 나서 대회 데리고 다니고, 운동을 보낸다. 그런데, 엄마는 날 보고 그 가능성을 못 봤던 것 같다. 무조건 안 시키려고, 돈 안 들이려고 했었겠나. 음악으로는 잘될 것 같지 않으니까 본격적으로 해보기도 전에 접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이 비루한 현실 드라마에서 제일 가는 빌런은 그 '이대 교수'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엄마, 아빠의 안목으로 아이의 날개는 펼쳐졌다 처절하게 접힐 수도 있고… 부모가 학식이 없더라도 지혜로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나저나 수영이나 자전거 같은 몸을 쓰는 활동은 한 번 배워놓으면 두뇌에 기억되는 방식이 공부를 하거나 정보를 외우는 것하고 다르기 때문에 잊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쩜 내 손은 피아노 치는 것을 이리도 새카맣게 잊었을까. 외우는 곡이 몇 곡 있기는 한데 앞에 몇 소절 건드리고 나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불가사의하다. 어떻게 이렇게 깡그리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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