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 군대 가는 꿈만큼 식겁합니다만
남자들 군대 갔다 오는 꿈 꾸듯이 나도 가끔 다시 수녀원에 가는 꿈을 꾼다. 어제도 그날이었다. 꿈에서의 수녀원은 늘 높이 산 중턱쯤에 있다. 한 25년 전 들어갔던 수녀원도 길음동 시장길을 주욱 따라 올라가면 저 끝에 나온다. 지난겨울에는 그곳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 가봤었는데, 상전벽해라는 말이 딱 이거구나 싶었다. 시장길은 뭐, 아파트 숲에 싹 다 밀려서 없어졌다. 그래도 숨이 잠깐 찰 정도로 비탈이 있는 것을 보고, '그렇지 이 길이지....' 싶은 정도.
꿈에서도 계속 비탈을 올라가서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 꿈은 이상한 것이 한 담벼락 안에 수녀원과 남자들 수도원? 혹은 신학교? 비슷한 것이 같이 있다. 즉, 남녀가 함께 수도를 하는 곳이었다. 수련 수녀님들의 숙소는 두 채, 1층과 2층에 침대가 있었다. 내 침대는 2층 구석 쪽에 있었다. 짐을 놓고는 다른 수녀님들 모두 일하러 나갔을 때 혼자 방에 남아 옷을 갈아입었다.
옛날 내가 있던 수녀원의 수련수녀들은 모두 검은색 점퍼스커트를 입었다. 우리 전 기수의 수녀님들은 처음 수녀원에 들어오면 모두 얇은 천의 길이가 짧은 베일을 썼었는데, 동기들은 그런 간이 베일은 쓰지 않고 짧은 단발이나 쇼트커트로 통일했다. 이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머리에 뭘 뒤집어쓰면 머리를 만지지 않아도 되고 쉬운데... 게다가 나 같은 말총머리들은 펌을 해야 손질이 되는 머리인데, 수녀원에서 미용실은 언감생심. 콘택트렌즈 끼는 것도 선생 수녀님 허락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 왜 '안경을 안 끼느냐'면서 눈칫밥을 먹었었다.
그 생각이 났었는지, 꿈에서는 검은 치마로 갈아입고, 머리에 뭔가를 둘렀다. 그리고, 목 뒤에서 똑딱단추를 끼운 촉감도 생생하다.
그렇게 수녀원 패치 제대로 장착하고 밖으로 나갔더니 수녀님과 남자분들(수사님? 신학생?)들 빙 둘러앉아서 뭔가 행사를 하고 있다. 보아하니 일일호프(응? 호프?) 같은 것이 열렸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모두들 즐거워 보였다. 나는 맥주가 있구나! 하고 내심 기쁜 나머지 큰 소리로 "저 맥주 마셔도 돼요?"라고 물어봤다. 워낙 술 욕심이 많아서 '남는 건 되지만, 모자라 건 안 돼.'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터라 '한두 잔 마시게 할 거면 안 먹어.'라는 생각으로 나도 술값은 해야지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맥주잔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애들 생각이 났다. '아, 맞아... 나는 여기에 있는 다른 수녀님들하고 다르지.' 하고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홀가분하게(?) 수도에 전념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아이들을 포기하고, 여기에서 계속 수도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나갈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꼭 수녀원 꿈을 꾸면 그 시간 내내 치열하게 하는 고민이 이것이다. 여기에서 계속 살 것인가, 나갈 것인가... 계속 살아도 되고, 나가서 살아도 된다는 마음이 반반인데, 꼭 나를 붙잡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애들은 누가 키우지. 누가 돈을 벌지. (나의 꿈피셜 상, 사실 수도원에 있는다고 아이들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니겠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잠시 외출 허락을 받아서 수녀원에서 나와 집으로 갔다. 수녀원으로 미처 챙겨 오지 못했던 운동화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95년에도 수녀원에 운동화를 안 가져와서 엄마한테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기다리던 소포가 왔고, 짠 하고 펼쳐보니 중학교 때부터 신던 낡은 운동화가 와서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초록색 가방을 하나 덜렁 집어 들고, 집에 갔더니 아빠가 서재에서 책을 바라보며 서 계셨다.
- 아빠, 나 수녀원 나와야겠어요. 오늘 다시 들어갔다가 이번 주만 수녀원에서 있다가 나올게요.
그랬더니 아빠가 쿨하게 웃으며 답한다.
- 그냥 가지 마. 여기 있으면 되잖아. 그리고 연락하지 마.
내 손에는 초록색 핸드백 하나. 지갑과 노트북은 다 있다. 그냥 가지 말까... 수녀원에 놔둔 물건들은 그냥 버린 셈 칠까. 집에 오니까 마음이 편안하네. 아, 그런데 아이들은 어디 있지. 다시 수녀원에 가서 일주일 버티다가 올까(꿈에서도 수녀원에 뭔가 보답을 하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면 나올 때 뭐라고 말하지.
예전에 수녀원 나오기 전, 한 달 정도 선생 수녀님과 함께 기도를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 때, 수녀님 방에서 단 둘이 남았을 때 내게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 밖에 나가면 수녀원 안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안정감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래도 삼시세끼 다 챙겨주고, 입을 옷, 살 집이 있지만 나가면 그걸 이제는 네가 다 해야 한다. 할 수 있겠냐.
그때는 그 말씀의 뜻이 뭔지 잘 몰랐는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너무나 치열하게 알게 된다. 이십 대, 삼십 대 치기 어릴 때는 '그런' 이유로 수도원에 눌어붙어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우스워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 또한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헤쳐나가는 방법이다. 그 또한 너무나 고결한 선택이라고. 사실 많은 것을 희생하고 택한 삶 아닌가. (쪼잔탱이 탕아인 내가 꿈에서 수십 년을 늘 주저하고, 고민하고 자빠진 상태를 보라!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견디고 뒤돌아보지 않고 택한 삶인지!)
그리고, 조직 안에서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밖에서 이렇게 피 터지게 각개전투를 벌이는 사람들과 무슨 다를 바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너도 나도 모두 다 인간으로, 맨몸으로 태어나 인생 빨갱이 빨치산이 되어 자기 총 한 자루씩 들고 조혼나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저 충고가 수녀님의 얼마나 용기 있고, 내밀한 고백이었는지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정말 나를 아껴서 해주신 충고였구나 하는 생각으로 뭉클해진다.
아, 베일을 아무리 눌러써도 이마가 엄청나게 넓고, 하얀 피부에, 내가 수녀원에서 너무너무 먹고 싶었던 뽀또 과자를 훔쳤을 때 혼내기는커녕 '에라이~ 먹고 죽어라~'라는 듯 뽀또를 박스채 사서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시고, 식사를 하고 나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셔야만 해서 몸이 날씬했던 선생 수녀님은 나중에 이야기 듣기로는 원장 수녀님까지 되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