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음주 사유

술이란 무엇인가

by 황섬

이번주의 만두 이야기는 잠깐 접어 두고 중간에 '쉬어가는 공원'처럼 술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지금 작업실에서 자서전 막판 작업(막판이 지금 한 보름은 간 것 같다)을 하고 있는데,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 없어 손에서 못 놓고 있는 책이 있다.

음주사유


KakaoTalk_20200910_123315878_08.jpg 책 표지에도 놓치지 않고 글쓴이의 '사유'에 대한 겹겹의 사유가 아로새겨져 있다.



이 책은 실물로 맨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제주도 종달리의 한 책방에서였다. 그 책방은 주인장이 읽었던 책(비매서적)과 파는 책들로 책장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비매 책장에서 발견되었다. 나야 늘 먹고 마시는 스토리에 온통 관심이 꽂혀 있으므로 그쪽에서 눈길이 배회하던 중....

음주사유? 오호라! 당장 집어 들어 중간 아무 데나 슥 펴고 읽기 시작했다.


글쓴이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어떻게 비틀즈에서 시작해서 어린왕자까지는 그래 워낙 유명하니 그렇다고 치자. 노르웨이의 숲에서 스탕달의 연애론을 지나 비발디의 ‘사계’를 봄, 여름, 가을, 겨울만이 아닌 각 악장으로 쪼개어서 음주 행태를 묘사한 데에 가서는 난 놀라 자빠질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술 먹다 끊어진 필름으로 ‘시네마 파라디조’의 성인 토토가 눈물지며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끊어진 필름을 이어 만들어주신 키스신들을 재현하는 내공, 아니 그 기획은 정말 가슴을 쿵쿵 뛰게 했다. 너무 재밌어서!

뒤로 가면 갈수록 기형도에 괴테 그리고 마르셀 푸르스트까지 모두 인사불성 고주망태 주정뱅이의 세계로 절묘하게 포개 놓는 이 사람 누군가, 괴물이다.

심지어 지금 내 자그마한 세계, 침대가 반을 덮어버리는 이 아늑한 작업실의 이름이 ‘마담 푸르스트’ 아니던가!

술이 이 책의 글이라면 그림은 안주다. 안주가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히 글을 돋보이게 하는 삽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그린이 혼자서도 이 책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KakaoTalk_20200910_123315878_10.jpg 이 귀여운 망각의 아이콘을 보자.


이쯤 되면 그린 이는 천재인 듯 했다.


KakaoTalk_20200910_134944146.jpg

글과 그림의 구성 못지 않게, 자신의 독특한 그림체를 완성한다.


KakaoTalk_20200910_123315878_04.jpg
KakaoTalk_20200910_130338262_04.jpg
아, 이런 걸 누가 그려. 진짜, 도대체, 어째서!!!



만화 한 컷 한 컷에 들어가 있는 글(주로 그림으로 그려진 주인공의 궁시렁댐과 혼잣말!)도 뭐 이래 센스만발이여..... 하고 읽다보니, 내 매의 눈에 걸려드는 것이 소리에 놀라버리는 바람과 같고, 그물에도 걸려버리는 사자와도 같지! 그렇지!

이름 보니까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것도 무척 복잡한 우정과 애정으로 점철된 이?

나의 공간, '마담 푸르스트'의 반을 덮어버린 바로 그녀.


KakaoTalk_20200910_123315878_05.jpg



며칠 전 이 책을 그녀에게 선물 받았다.

출간 10년이 지났는데, 디자인 손색없다. 편집 최고다. 무엇보다 내지 디자인 진짜 누가 해주셨는지 이 글쓴이와 그린이는 그분의 손을 부여잡고 따끈하게 데운 '지느러미 정종'이라도 한 잔 따라 드려야 마땅하다.


글쓴이는 그린이의 페북 댓글판에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댓글을 읽고 하도 반가워서 실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다. 내 기억에 분명히 우리 어렸을 때 동네 풍경을 함께 추억했던 댓글이었다. 타래에 또 타래를 이어 내려가다 보니 아, 이 두 양반과 나는 격동의 74년도에 태어난 동갑내기들이었다.

각설하고 책 속으로....

두보 vs 이백_ 세기의 술판, 지상 중계! 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깜찍한 발상인지! 게다가 사회자는 [100분 토로]의 손사케다!!! (빵 터져보자!)


KakaoTalk_20200910_130338262_03.jpg
KakaoTalk_20200910_123315878_03_LI.jpg


"사회자//(득의양양한 미소로) 제 왼쪽에 계신 분이 712년생 시인 두보 씨구요, 오른쪽은 701년생 시인 이백씨입니다.

....

두보 시인은 2009년 정우성 주연, 허진호 감독의 한국영화 「호우 시절」에 나오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오는가’ 好雨知時節의 「봄비 오는 밤 春夜喜雨」으로 다시 주목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덟 명의 애주가를 노래한 「음중팔선가 飮中八仙歌」, ‘나라는 깨졌어도 산하는 남았네 國破山河在’로 유명한 「춘망 春望」 등이 그의 대표작이지요.

...

자타가 공인하는 ‘술과 달의 본좌’ 이백 시인은 ‘왜 산에 사느냐기에 그저 웃지요’의 「산중문답 山中問答」, 널브러져 마음대로 마시자는 「대작 對酌」과 ‘뭐, 사람 없으면 꽃하고 달하고 그림자랑 술 먹지’ 하는 「독작 獨酌」, 시인을 달 홍보대사로 격상시켰던 「잔을 멈추고 달에 묻노니 把酒問月」 등 수많은 히트 작품들을 갖고 있구요.

......"


아, 노안이 심해져 침침한데 작은 글자 읽고 한문 바꾸는 것도 이리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이렇게 한땀 한땀 읽고, 또 쓰고 싶었다. 도대체 이 수많은 정보들이, 이 홍수같은 지식들이 모두 글쓴이의 머릿속에 들어있단 말가!!

결국 뒤에 가면 ‘무릉동’에 사는 도연명까지 시청자 전화 연결로 초청한다. 이미 거나하게 한 잔 걸쳐 혀가 배배꼬인 무릉도원의 도선생님은 전화 인터뷰 중 오바이트를 하시고, 결국 귀거래사를 끝까지 외치며 마무리. 뚝.

이백과 두보의 주거니 받거니 쑈는 엔드리스. 계속 된다. 보다못한 AD가 양팔을 들어 사회자 손사케에세 X자를 표시하고... 이때도 그냥 컷트 될 리 없다. ‘이따금 낯선 중국어’가 뒤엉켜 등장하면서 나를 웃긴다.

참고로 이백 시인은 62세, 주보 시인은 59세에 열반하셨다 한다.


여기서 리뷰를 그만두는 것은 마치 코로나로 인해 발동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인해 밤 9시에 술집이 문을 닫아 쫓겨나오는 것 만한 아쉬움이다.


- 아, 한 잔만 더. 응? 딱 한 잔만 더하자.


앞서 이야기한 비발디의 ‘사계’를 사시사철 네 파트로 자르고, 각 악장별로 썰어서 각종 안주로 내어놓은 술상은 이 책의 백미다. (내가, 나의 편견으로 골랐다. 하얀 눈썹. 최고의 아름다움!)

참고로 안주의 안은 ‘누를 안 按’자를 쓴단다. 누르고, 어루만지고, 당기고... 술을 이렇게 지긋이 눌러주고, 부드러이 만져주고, 당길 때 확 마셔버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안주’겠다.

제목과 메뉴만 정리해도 느낌이 확 올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취할 수 있을 듯 하다.


> 제1악장 – 분주하게 Allegro

매운 양념의 쭈꾸미

> 제2악장 – 사뭇 심각한 Largo

> 제3악장 – 얼큰하게 취한 Allegro

하룻밤의 매콤한 갈무리


여름

>제1악장 – 너무 서두르지 말고 Allegro in molto

주점으로 들어서다. 파전, 깍두기, 막걸리 냄새

>제2악장 – 발동 걸린 Adagio

1. 피자만 한 해물파전 with 간장에 절여진 양파 2. 회사... 응... 회사. 제일 맛있고, 절박한 안주 3. 모둠전 (글쓴이는 고추전을 좋아한다 했지만, 나는 명절마다 먹는, 바로 그 동태전을 제일 좋아한다)

>제3악장 – 정신줄 놓는 Presto


가을

>제1악장 – 기다리고 기다리던 Allegro

전어회

>제2악장 – 신파야, 신파 Adagio

오징어회, 개불, 멍게, 해삼 등속

>제3악장 – 어김없이 취한 Allegro

생굴 먹겠다 고집했던 기억?


겨울

>제1악장 – 달리는 폭주 기관차 Allegro

1. 굴. 당연히 깍두기와 새빨간 겉절이 김치 2. 수육에 설렁탕 3. 보드카........ (안주는 크래커에 올리브 정도 되지 않았을까)

>제2악장 – 찬바람에 설레는 Largo

세숫대야만 한 짬뽕(전투력 up!)

>제3악장 – 아무래도 좋아 Allegro

사케에 오뎅일까?

그리고 마지막 안주. 조하문의 우리들 사랑이 담긴 조금만 집에 옹기종기 모여 정다운 이야기,(이쯤되면 다들 숨이 멎으려고 한다...) 서로의 즐거움 슬픔을 나누던 바아아아아암~~~(이 대목이 바로 공기 반, 소리 반의 신공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아까 못 쉰 숨 여기서 다 내뱉는...)



나는 술을 마시면 늘 하는, 아니 이제는 끊은 게임 하나가 있다. 바로 진실 게임이다.

게임의 법칙은 1. 늘 사실만 이야기할 것 2. 성실하게 답할 것 3. 이 자리를 벗어나면 잊을 것

절찬리에 판매 중인 에세이, 시나리오쓰고있네 에도 출연하는 그와 1994년 겨울, 처음 시작한 게임이다. 저 룰도 내가 두부김치를 먹으면서 지었다. 두부를 늘 사등분해서 조그만 조각으로 만들어 그 위에 김치를 아주 말 모이도 아니고, 새 모이만큼 올려 자근자근 먹던 그.

그러나 술은 말술이었던 그는 자주 필름이 끊겼다. 그때가 한참 팔팔한 이십대였음에도. 그래서 내가 아무리 그의 귀에 대고 진실을 말해줘도 기억을 잘 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원칙 3번은 뭐 있으나 마나.


그 뒤로 나는 나와 함께 테이블을 마주앉은 이들과 거의 매번, 강력하게 거부하는 일부 인간들과 함께일 때를 제외하고, 매번 이 게임에 대해 설명 및 설득을 진행한 후 실행했다. 결과는 늘 깔깔대며 만취. 단 한 번도 심각하게 게임이 끝난 적이 없었다. 질문이 경쾌해서였을까, 아니면 진실이 상쾌해서였을까, 정말 아니면 게임의 룰을 어기고 무거운 진실은 숨기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KakaoTalk_20200910_134652049_01.jpg 어린왕자와 진실게임을 하고 있다. 하필이면 안주 또한 두부김치군.


이 책을 읽고 난 후 책장을 덮고 이 생각을 한번 해본다. 내 이 책을 쓴 이와 그린 이를 만나면 몇 년 동안 중단했던 진실 게임을 다시 재개해볼까.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은 위험한(?) 진실 게임에 나의 모든 비밀을 맡겨도 괜찮을 것 같은 믿음이 발동한다.

아니, 벌써 진실 게임은 시작됐다. 지금 내내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있잖아. 음주 사유를. 왜 그렇게 진창 마셔대는지. 왜 여기서는 이걸 마셔야 하는지.

아, 술 냄새가 이렇게 나를 롤러 코스터를 태울 리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내내 귀에 맴돌던, 아니 글쓴이가 나보고 들으라고 일부러 틀어 놓은 듯한 음악을 들으며 책장을 덮는다.

배인숙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https://youtu.be/hgRA6aQEOMo



KakaoTalk_20200910_134218321.jpg 취화선의 경지에 다다른 멍은하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