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crastinate (자동사 격식, 못마땅함 [V]) (해야 할 일을 보통 하기가 싫어서) 미루다 [질질 끌다]
이 단어를 호주 교환학생 때 처음 알게 됐다. 꽤나 복잡한 스펠링의 단어지만, 너무나 쏙 꽂혔다. 나의 인생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궁금한 것도 많고, 성격이 급하다. 그래서 생각이 들면 실행력 있게 일을 벌이곤 한다. 그러나 꾸준히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확인하거나, 세심하게 마무리하지 못한다. 결국 벌인 일들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시작할 때는 열정 충만인데, 마무리를 미루고 미뤄서 억지로 디데이에 맞추어 일을 끝내곤, 완성도야 어떻든 끝냈다는 것에 만족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디데이 즉 정해진 시간이나, 눈으로 보이는 양적 결과물들은 얼추 맞추는 편이었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남들에게 못하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모든걸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에 나타나는 '폭발적인 힘'이나 '내일의 나의 의지'를 믿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과제도 최대한 미뤘다가 쉬는 시간에 후다닥 하는 편이었다. 고등학교 때 인강이나 대학교 온라인 수업의 경우에는 최대한 미뤘다가 딱 맞춰서 끝나는 시간을 역산해서, 2배속으로 듣곤 했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중간, 기말 시험은 항상 벼락치기로 쳤는데, 저녁 6시에 시작해서 오전 시험 끝내고 일단 자고, 저녁부터 또 울면서 시험을 준비하곤 했다.
결석은 없지만, 지각은 자주 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잠이 많은 것도 아닌데 아침에 지각을 자주 했다. 대략 늦는 이유는 이랬다. "어,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났네. 1교시 수업이니까 9시 수업이지. 일단 우리 집에서 역까지 마을버스로 15분. 그리고 A역에서 B역까지 지하철로는 50분이고 B역에서 학교 셔틀 타면 10분 걸려서 강의실까지 전속력으로 뛰어가면 5분. 그러면 1시간 20분 정도면 되고, 씻는데 10분 화장하는데 10분 옷 입는데 5분이면 되겠지. 그럼 50분 동안 딴 거 해야지" 하면서 여유롭게 TV를 보거나 밥을 먹는다. 근데 저 시간 계획의 단점은.. 정말 말 그대로 순(純) 소요시간이란 점이다. 당연히 마을버스나 셔틀버스, 지하철의 대기시간이 있을 수 있고, 내가 옷을 입으며 갈등 때리는 시간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시간계획은 꼬이고 지각이 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나, 또는 나의 일정은 완벽할 것이란 강한 긍정적인 믿음이 '미루는 나'를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꽤나 크게 데인 적이 있다.
대학 때 원어민 교수가 진행하는 영어발표 수업이 있었다. 그날의 과제는 <How to ***>라는 주제로 무언가 하는 방법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보통 발표가 두 번의 수업에 나눠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딱 중간 정도의 순서였는데 보통 두 번째 날에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설마 하면서 준비를 안 해갔다. 그런데 뭔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때마침 그때가 빼빼로 데이여서, 사람들의 환심도 사면서, 함께 까먹으면, 조금의 시간을 벌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동기들과 교수님을 위한 빼빼로도 사갔다.(소규모 수업이긴 했다) 근데 아뿔싸... 앞에서 준비를 안 해온 애들이 있었다. 게다가 발표하는 학생들도 분량이 그리 길지 않았다. 내 차례는 점점 다가왔고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원어민 교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 "Sorry, I didn't expect that my turn is coming so fast. I thought it would be next time." 그러자 선생님이 웃으며, 아니 웃는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Then.. you did gamble, right?"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중요 단어는 확실하다. GAMBLE, 도박이었다.
맞다. 미루는 것은 갬블이다. '내일의 나'라는 불확실한 존재를 믿는 도박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아무리 의지가 충만하더라도 지금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인생에 껴든다. 그러나 도박의 매력은 되면 대박이다. 하기싫다는 감정에도 몸부림 쳐 가면서 얻게 되는 안정감이 1이라면, 미루면서 딴 짓을 했을 때의 그 즐거움, 몰아쳐서 데드라인에 맞췄을 때의 그 짜릿함은 한 10정도의 기쁨을 준다. 매번 매번 1을 벌면, 궁극적으론 10보다 훨씬 더 많이 얻을 수도 있는데 인간은 한 번에 10을 벌기위해 멍청하게 그 도박판에 판돈을 건다.
나이가 들면서 확실히 불확실성보다는 안정성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회사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회사에선 그냥 뭐든지 명령을 받자마자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는 편이다. 또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는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매년 반복되는 일정에 맞춰 미리미리 준비한다. 시간 약속도 먼저 나와서 미리 기다리는 것이 마음 편하다. 예로 차로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아침 출근 전에 헬스장을 끊었다. 아침 6시 30분에는 집에서 나와서 운동을 하고 9시 전에 여유롭게 사무실 의자에 앉는다. 예전에 미루는 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못하는 건 없다.
그럼에도 그 낌새가 남아있었나 보다. 먼-데이 에세이라고 나 스스로 월요일이라는 마감 제약을 주고 시작했지만, 지난주에는.. 결국 못썼다. 물론 이 글도 미리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런저런 생각 끝에 일요일까지 시작도 못했다. 결국 일요일의 나는 월요일의 나에게 S.O.S를 쳤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마무리한다. 적어도 이번 도박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