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학교야, 감옥이야?

나 때는 말이야, 너희 나이였을 때 인도에서 살았어

by 초쌤

인도에 온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가장 숨이 막혔던 건 ‘정해진 규칙 안에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학교 학생이면 규칙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야?"


학생이라면 규칙을 따르는 건 당연하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이 규칙들은 특히 기숙사생들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학생들 간의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러한 규칙들이 생겨난 것이겠지

하지만 어떤 규칙은, 사고를 막기 위한 예방선이 아니라 개인의 숨결까지 통제하려는 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에서의 학교와 기숙사 생활은 내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언제 일어나고, 언제 씻고, 어디를 가고, 누구와 대화할 수 있는지까지
하나하나 규칙의 감시망 아래 있는 것처럼

‘하고 싶은 것’보다는 ‘허락된 것’ 안에서만 움직여야 했다.

자유는 선택의 여지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표 사이사이에 간신히 숨겨져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왜 기숙사 학생들 모두가 이곳을 '감옥'이라고 불렀는지

지금부터 그 이유가 되었던, 이 학교의 엄격한 규칙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이 규칙들 속에는 인도 문화와 그의 종교가 잘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선 모든 학생에게 School Diary가 한 권씩 지급되었다.

그 안에는 학교 규칙과 복장 규정, 주요 행사 일정과 메모란, 그리고 학교 교가와 인도 국가까지 빼곡히 담겨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조례에 참석해야 했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월요일이나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전교생이 운동장이나 강당에 모여 아침 예배를 드리곤 했다. 나머지 요일엔 저 학년과 고 학년이 따로 모여 교과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아침 조례를 맡으셨다.


학교 교가와 인도 국가 노래를 매일 불러서 그런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1. 학교 복장 규제

학교는 유독 복장 규제가 엄격했다. 교복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 로고가 박힌 파란색과 흰색의 긴 촌스러운 양말과(양말이 너무 길어서 로고만 보이게 접어서 신고 다녔다) 반짝반짝 닦인 검정 구두까지 단정함의 기준은 철저했다.

머리 규정은 더했다. 모든 여자 학생은 머리를 반드시 양 갈래로 묶어야 했고, 머리가 길 경우엔 양 갈래로 땋은 뒤, 검은색이나 흰색 리본으로 말끔히 고정해야 했다. 머리를 하나로 묶는 것도, 자연스럽게 풀어놓는 것도 모두 금지


남학생들은 항상 짧은 머리를 유지해야 했고, 단정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지적을 받았다.

여자든 남자든 심지어 옆머리 한 가닥이라도 삐져나와 있으면 선생님들께 바로 지적을 당했다.

남자 기숙사 학생들 같은 경우 가끔 사감이 이발기를 가지고 와서 학생들의 머리를 밀곤 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규율의 대상이고, 용납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토요일에는 격주로 학교에 가야 했는데, 그날은 교복이 아닌 학교 체육복 풀 세트를 입어야 했다.

평일과 달리 편안한 체육복 차림으로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학교 체육복, 안경 쓴 소녀가 글쓴이다. (Lamb's rock에서)


평소에는 학교에서 정해준 검은색 단화를 신어야 했고,

체육 시간이나 토요일에는 Bata(바타) 브랜드의 흰 운동화를 따로 준비해 신었다.

‘Bata’는 인도에서 가장 흔한 국민 신발 브랜드였는데, 나중에 알게된 사실은 이 브랜드는 미국꺼라고 한다.


학교에서 아예 “Bata 제품으로 준비하세요”라고 지정해 줄 만큼 인기가 많았다.

Bata는 Buy and trow away의 줄임말이다.

사고 버리라니.. 진짜 말 그대로 내구성이 별로던 운동화였다. 이런걸 돈 주고 사다니..


그 흰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을 달리고, 체육 시간 준비 운동을 하던 기억이 난다.
디자인도 투박했고 발바닥도 아파 착용감도 별로였지만, 그땐 누구도 그걸 불평하지 않았다.


아, 한국인들만 빼고 (하하)


그래서 나중엔 한국에서 가져온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한국 학생이라서 좋았던 점은, 우리가 그런 신발을 신는 건 묵인되는 분위기였다.


몰래 어기면서도 혼나지 않던 그 상황이, 어딘가 기묘하게 기분 좋았던 것도 같다.


‘어라?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싶은 약간의 기분 좋은 방종.


2. 특이한 우리 학교 규칙

이 학교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강력했던 규제 중 하나는, 남녀 간의 대화조차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복도나 운동장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선생님들은 그 장면을 가차 없이 지적했다. 심지어 사귄다는 사실이 적발되면 즉시 퇴학이라며 선생님들께서 겁을 주곤 하셨다.

공식적인 행사나 수업 외에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눈에 띄게 가까워지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셈이다.
그 시절, 서로 쪽지를 주고받거나 조심스럽게 말을 섞는 것도 일종의 모험처럼 느껴졌던 이유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휴대폰이나 전자기기 소지도 엄격히 금지됐다. 발견되는 즉시 압수는 물론, 퇴학까지도 고려되는 중대 사안이었다.


복장 규제나 전자기기 사용 금지, 심지어 이성 교제까지 사실 그런 규칙들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다.

외국인이 이 공식 규율을 따르지 않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건 퇴학으로 직결되는 일이었다.

한 번 퇴학당하면 부모님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보랴
그때는 진짜로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불합리하게 느껴져도 우리는 결국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중에서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건 따로 있었다.


학교 일과가 끝난 후,

기숙사생은 ‘허락 없이’ 기숙사 밖을 나갈 수 없다는 규정

이건 단순한 규칙을 넘어,
학생들의 하루 24시간을 완전히 학교 울타리 안에 가두는 일이었다.


3. 기숙사 학생들의 엄격한 하루


앞 회차에서 이야기했듯, 기숙사생들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잠들어야 했다.

새벽이 되면, 하루의 시작은 기숙사 내 새벽 기도회로부터 시작됐다.
기도를 마친 후엔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며, 각자 순번에 따라 기숙사 청소를 맡곤 했다.

나는 그 청소 중에서도,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을 유독 좋아했다.
그 일을 맡으면, 정해진 시간이 아니더라도 여자 기숙사를 잠시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새벽의 공기를 마시며 나는 혼자 짧은 산책을 하는 듯한 기분에 잠기곤 했다.

고요한 하늘엔 별이 떠 있었고, 가끔은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빨리 방학이 와서, 나도 저 비행기를 타고 집에 가고 싶다.’


기숙사생들은 학교 일과가 모두 끝난 후에도 기숙사 측에서 정해준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저녁시간 이후에도 자유 시간이라는 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그날그날 지정된 프로그램에 맞춰야 했다.
체육이 있으면 체육을, 음악 교실이 있으면 음악 교실에 가야 했고, 그 시간표마저도 기숙사에서 정해주는 대로 따라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나는 이미 한국에서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음악 시간에는 따로 피아노실로 가 혼자 연습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게, 하루 중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의 눈치도, 규칙도 잠시 내려놓고 내 손끝에서 흐르는 소리를 통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피아노는 내가 인도에서 4년간 지낼 수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2016년에 다시 만난 그리웠던 나의 음악실과 피아노

기숙사 생활을 하며 제일 이해할 수 없었던, 아니 도무지 타협할 수 없었던 일은

바로 사감의 말이 곧 법이라는 것이다.

기숙사에서 샤워를 할 수 있는 것도, 과자를 먹을 시간을 주는 것도 다 사감의 통제하에 있었다.


4. 과자도 마음대로 못 먹어요
기숙사 한쪽 창고에는 각자의 간식을 넣어둔 작은 상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Tuck box라 불리던 그 상자들은 모두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사감은 그 열쇠들을 수거하여 창고 문을 잠군다. 누구도 허락 없이 간식을 꺼낼 수 없었고, 문이 열려 할지라도 아이들은 자기 상자조차 만지지 못한 채 그 앞을 지나치곤 했다.

과자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주말 혹은 특정 평일, 사감이 열쇠를 열어주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만 우리는 자신의 tuck box를 열 수 있었다. 모두가 동시에 상자를 열고, 바닥에 앉아 먹는 모습, 그리고 우리를 감시하는 듯한 사감.

지금 생각해보면 아동 학대였지싶다.


급하게 봉지를 뜯는 손, 한 입씩 천천히 아끼는 아이, 간식을 나누다 다툼이 나는 일도 있었지만, 그 시간 마저도 마냥 즐거웠다.

시간이 되면 다시 열쇠는 회수되었고, 상자들은 차례로 닫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시절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과자 하나를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일상, 작은 상자를 열기 위해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단순히 간식을 통제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절제와 통제를 배우는 방식이었다는 걸. 자물쇠로 닫힌 상자 안에 있었던 건 단순한 과자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유'라는 말의 무게를 조금은 일찍 알게 된 순간들이 그 안에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5. 샤워 통제

주니어 기숙사에서 지낼 동안 샤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주니어 기숙사의 경우, 샤워는 정해진 날에만 허용되었고
그 기준은 단 하나였다. 바로 그날 체육 수업이 있느냐, 없느냐

체육이 있는 날은 샤워를 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은 씻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그 정도가 샤워를 허락받을 수 있는 최대치였다.

기숙사 바깥에 따로 떨어져 있는 샤워실 또한 허락 없이는 절대 이용할 수 없었다.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농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철저한 규칙과 승인 절차 속에 있었다.
씻는 것조차, 학교가 정해준 시간표 안에서만 가능했다.


'내가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 거 맞지? 여기가 군대인가?'


처음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이해하려 애썼고,
결국엔 익숙해져 버렸다. 씻지 못하는 아주 찝찝한 루틴이 내 삶에 생기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나는 사감의 경고를 무시하고 샤워를 하면서 머리를 감았다.
머리가 가려워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룸메이트 학생들이 사감에게 일러바쳤고, 사감이 나에게 머리를 왜 감았냐고 물었다.

나는 못 알아듣는 척 연신 "What? What?" 거렸다.

이내 사감도 포기하는 눈치였다.


이곳, 쿤누르는 선선한 기후에 밤에는 제법 추웠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주 씻거나 머리를 감으면 감기에 걸린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 사감이 건강을 이유로 샤워마저 통제했던 것이다.


5. 사복 통제

여러분이 글을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질 수도 있다. 바로 '사복 통제'

기숙사에 있다고 해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짧은 크롭티나 일반 반팔 티셔츠, 짧은 바지, 다리가 보이는 치마, 7부 바지는 당연히 금지였고, 티셔츠를 입더라도 엉덩이를 덮는 기장이어야 했다.

하의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내려오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의 선이 드러나지 않는 옷만 허용되었던 셈이다.

그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한국인들은 패션에 민감한데 내가 원하는 패션대로 입을 수 없다니.. 인도는 나를 정말 패션 고자로 만들어버리려 작정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도 사회는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보수적이었고,
학교는 특히나 여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였을까 이성 교제는 명백한 퇴학 사유였고, 남학생과 조금만 대화를 나눠도 선생님들이 곧장 "뭐 하는 거냐"라고 지적하곤 했다.


Lhadon과 음악 교실 앞에서

물론, 지금은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2023년, 중학생 제자와 함께 방문했던 인도의 Bangalore는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Coonoor는 달랐다. 시간이 멈춘 듯,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인도에서 유학했었을 당시

그곳은 단순한 문화 차이를 넘어 나에게는 그저 탈출하고 싶고, 죽고 싶은 장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그곳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서로 다른 세계를 품고, 낯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꽤나 힘들었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인도

그 시절에 내가 인도에 있었기에 당연한 일상에 대해 감사히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학 생활의 기록이 아니다.

이방인의 자리에서 겪어낸 낯설고 불편한 경험들,
그 속에서 터득한 인내와 성장,
그리고 돌아보니 더없이 소중했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먹는것, 샤워조차 허락 받아야 했던 삶,
별을 보며 그리워하던 집,
몰래 속삭이던 밤의 대화들.
그 조각조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낯선 환경 속에 놓인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고, 견디며 자신만의 ‘인도’를 지나고 있겠구나.


그래,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만의 ‘인도’를 지나고 있을지 모른다.

꼭 낯선 나라가 아니어도,

늘 걷던 길, 익숙한 집,

사회 생활,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서툴고,
때때로 막막하지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15살의 그때의 나처럼


다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누구나 말 못 할 무게 하나쯤은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무게를 견디며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 성장의 형태는 자신만의 모양으로 자라나는 중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겼다고
그리고

당신의 ‘인도’도, 시간이 지나면

당신만의 단단한 길이 되어 있을 거라고.

2016년 인도 재 방문 당시 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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