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15살의 나와 마주한다

나 때는 말이야, 너희 나이였을 때 인도에서 살았어

by 초쌤

학생을 다루는 직업군에 있는 이들은 사춘기 시기의 학생들을 다루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강사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비로소 어른들과 선생님의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교육해 사람으로 성장하게 돕는 것이 가르치는 이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사춘기가 심하게 왔던 나를 인간 답게 만들어주기 위해 당시 인도 학교의 선생님들과 사감 선생님들은 꽤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나는 인도에 있으면서 유난히 반항적이었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던 것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인도의 특유한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문화가 큰 원인이었다.

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만큼 절대적이었다. 자신의 의견보다 선생님의 의견이 언제나 우선시 되었고, 그에 반하는 언행은 곧바로 부모 소환이나 정학 처분으로 이어지곤 했다.

학생의 인권은 좀처럼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소한 실수에도 꾸지람은 일상이었고, 선생님이 아이들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그저 흔한 풍경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인도 관련 영상을 조금만 찾아봐도, 경찰들이 범죄자를 구타하거나 뺨을 때리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등장한다. 공권력의 권위가 세계 최강처럼 느껴지는 곳이었고, 학교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체벌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만연하게 존재했다.


물론 잘못은 학생들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선생님에게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반 친구들을 보며 오히려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전형적인 중2병 자의식 과잉의 늪에 푹 빠져 있었다.

잘못을 해놓고도 일부러 선생님 앞에서 가오를 잡고, 괜히 센 척을 했다. 그러면 친구들이 나를 대단한 존재처럼 바라보는 것 같았고, 그 시선이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비록 허세였지만, 나는 그 허세를 진짜 힘인 양 휘둘렀다.


게다가 유학생이라는 특수한 위치가 내 안에 이상한 강박을 심어주었다.

‘여기서까지 기죽고, 나약하게 보이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박약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싫었고, 오히려 그 반대로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나를 혼내는 듯한 언행을 해도 한국말 욕으로 받아쳤다.

(물론 선생님은 못 알아들었지만, 표정으로는 다 들켰다.)


사감 선생님과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수업 시간엔 엎드려 자거나, 수지랑 몰래 종이에 한국말로 편지를 돌려 읽으며 키득거렸다.


Stanes 학교에는 아침마다 조례 시간이 있었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예배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똑바로 서 있는 것도 지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금만 자세가 흐트러지면, 선생님들의 가차 없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수지와 함께 ‘조례 잠적 작전’을 실행했다. 우리의 은신처는 학교 화장실이었고 대략 사흘에서 닷새쯤 숨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기발한(?) 계획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교생 수백 명 중 한국 여자아이 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금세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들키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순진한 착각이었다.

결국 교감 선생님에게 붙잡혔고, “왜 하필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숨어 있었냐”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 말이 어찌나 우스웠는지, 나는 웃음을 참느라 혼나는 내내 진땀을 흘렸다.


하루는 수업을 빼먹고 혼자 피아노실에 숨어들었다. 음악 선생님인 Wrestly 선생님과는 꽤 친했기 때문에, 그런 내 행동을 종종 눈감아 주시곤 했다.

하지만 학교는 좁았다. 마치 새장처럼 갇힌 공간 안에서 숨을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고, 전교생 중 한국 학생도 몇 되지 않아 어디를 가든 쉽게 눈에 띄었다. 결국 금세 들키고 말았고, 선생님들께 혼나는 건 거의 일상이었다.

학교가 아무리 커도, 유학생에게는 숨을 곳이 많지 않았다. 눈에 띄는 동양인 얼굴 덕분에, 어디를 가든 쉽게 발견되곤 했다. 뭐랄까, 학교 안의 작은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하하

그래서 나는 수업을 빼먹고 싶을 때면, 자연스럽게 선생님들의 시선을 피해 운동장이나 음악실, 때로는 학교 사무실까지 어슬렁거리곤 했다.
사무실에 간 이유는 거기에 Marshal이라는 직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는 꽤 친해서 가끔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고, 아빠에게 전화하고 싶으면 사무실 전화로 몰래 걸기도 했다.


나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업 중에도 이어졌다.

선생님들이 뒤돌아 칠판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나는 몰래 일어나 그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장난을 쳤다. 교실을 나갔다 왔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기숙사에서 몰래 가져온 과자나, 친구들이 사다 준 과자를 책상 밑에 숨겨두고 몰래 꺼내 포장을 살짝 찢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살짝 뛰었다. 친구들이 홈메이드 인도 음식을 맛보라며 자신들의 도시락을 건네줄 때면, 나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받아들이며 뒤돌아보는 선생님의 눈치를 봤고 킥킥거리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장난기 넘치는 대화가 교실 공기 속을 떠다녔다.


수업을 몰래 빼고 놀았을 때, 프레실라 사감은 그 일에 대해 혼내거나 굳이 묻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아, 포기하셨나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가끔 우리에게 규칙을 강요하며 엄격하게 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 나름대로 타국에서 온 학생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여러 번 대들기도 했고, 친구와 함께 불평을 늘어놓으며 욕하기도 했다.


타국, 감옥 같은 학교, 기숙사, 낯선 환경, 하루 종일 규율 속에서 지내야 하는 나에게,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았다.


학교 하루 일과가 끝나면 기숙사 일과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기숙사에서 주어진 자습 시간 동안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프레 실라 사감은 늘 나와 수지 옆에 앉아 계셨다.

우리가 한국어로 떠들어도, 크게 혼내지 않으셨다. 원래 규칙상으로는 지적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초반 몇 번만 살짝 경고하시고는 대부분 눈감아 주셨다.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 울기도 했는데, 그녀는 그럴 때마다 “헬리콥터를 불러서 한국으로 보내줄까?” 하며 달래주셨다. 농담이었지만, 우리를 달래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으랴


기숙사에서는 부모님이 걸어오는 전화만 받을 수 있었는데, 보통은 다른 학생들을 배려해 10분 정도만 통화가 허락되었다. 하지만 프레실라는 우리에게 “원하는 만큼 통화하고, 끊고 싶을 때 끊으라”라고 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마음 놓고 부모님과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작은 배려가 큰 위로가 되었다.


그녀는 한국 사탕과 젤리를 좋아했지만, 특히 내가 쓰던 바닐라 향 니베아 립밤을 탐냈다.

한 개 밖에 없어서 직접 바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한국에 가면 꼭 이 립밤을 사야겠다”며 웃곤 했다.

그런 그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내게는 너무도 정겨웠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며,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묘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낯설고 답답했던 학교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내게 조금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으로 남았다.


나중에 프레실라 사감은 결혼을 위해 기숙사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게 그녀와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는 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당일, 릭샤에 올라탄 그녀가 멀어져 갈 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마 싸우고 부딪히는 사이에도 정이 들어버렸던 걸까
아니면, 단지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걸까

그래도 단순한 나는 금세 눈물을 닦고, 언제 울었냐는 듯 친구들과 웃고 장난을 쳤다.


몇 주 후 그녀의 결혼식에 초대받았을 때
나는 큰맘 먹고 프레실라가 좋아하던 바닐라 향 니베아 립밤을 새 제품으로 선물했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그 향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짙게 남아 있었다.


나의 dorm parent, 첫 사감 선생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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