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꼼지락 만화방의 지킴이 "꼼지"
올여름 더위는 유독 지독하다. 2018년 이후로 혹독한 여름을 맞이한 듯하다. 머리카락 끝자락이 구슬 같은 땀방울들로 송골송골 맺혔다. 기력이 부족한가 싶어 민생회복지원금으로 소고기를 사 먹었다. 이 계절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내기로 했다. 겨울이 다가오기 전 독감예방 주사를 접종하듯 기나긴 무더위를 맞을 채비를 한다. "올해는 어떤 장소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하나"하고 물색했다. 머리가 습기를 한껏 머금어서 부풀어진 채로 동네를 배회하던 중 만화방을 발견했다.
유유히 만화방을 배회하는 꼼지어릴 적 집 앞에 있던 “집현전”이라는 책 대여점이 떠올랐다. 판타지부터 무협, 만화, 소설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을 대여해 주는 곳이었다. 주로 청춘물 장르를 빌려봤다. 천계영의 <언플러그드보이>, <오디션>을 좋아했고, 현겸이(언플러그드보이의 남자주인공 강현겸)처럼 풍선껌을 부는 것이 유행이었다.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서 회색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만화방 이름은 “지하실 꼼지락” 서늘한 동굴 같은 느낌의 통로가 마음에 들었다. 이 공간이 올여름 나의 아지트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입구에서 나를 제일 먼저 맞아준 건 의외의 존재였다. 긴 털을 가진 회색고양이. 내가 들고 온 쇼핑백 안을 기웃거리다가 종내는 쇼핑백 안에 파묻혔다. 귀여운 존재에 한껏 마음을 빼앗긴 채 만화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쾌적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회사 휴게실에서나 볼 수 있는 리클라이너가 열을 맞춰 자리 잡고 있었다. 리클라이너 위에 조금 전 입구에서 마주친 고양이 꼼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구역 안방마님이 따로 없다. 벽면을 따라 서가들이 쭉 이중 삼중으로 배치되어 있다. 공간에서 제일 돋보이는 곳은 “굴방”이다. 바닥에는 폭신한 매트리스가 깔려있고 쿠션과 무릎 담요가 굴방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일본의 난방기구인 고타츠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듯한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공간이다. 나중에 독서모임 회원들과 같이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권을 끊고 서가를 둘러보다가 읽고 싶은 만화책 다섯 권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가죽과 신체가 마찰하는 소리에 꼼지가 곁눈질로 째려봐서 깜짝 놀랐다. 의자를 뒤로 젖혀 앉고 다리를 뻗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팔걸이에 팔을 걸친 채 집중해서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허기가 진다. 만화방 사장님의 어깨너머로 찬장에 진열된 라면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만화방에서 한강라면을 맛볼 수 있다니 지하낙원이다. 라면과 스프라이트를 주문해서 자리로 돌아와 다시 베르세르크(일본 만화가 미우라 켄타로의 연재만화)를 읽는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주인공 가츠의 철학과 김영하 작가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의 한 구절이 대비돼서 떠오른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그동안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았나 되짚어 보았다.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도망갔던 것 같다. 그런 선택들이 맞물려서 지금의 내가 되었을 텐데, 나는 또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상황에서의 선택이 내게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내가 상상한 만족하는 삶은 옷방에 스타일러를 들여놓을 여유 있는 삶이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고 저녁 10시경 숙면할 수 있는 상태가 행복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리클라이너에 다리를 뻗고 누워서 이렇게 만화책을 보는 것도 안분지족에 가까운 삶이 아닐까 싶다.
집에 오는 길에 추가로 끊은 정기권으로 베르세르크 만화책 다섯 권을 대여해서 돌아온다. 호기심에 “만화방을 차리는 법”을 검색해 본다. 그러나 역시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은 부분이 많음을 깨닫고 다시 만화책을 빌려보는 삶을 선택한다. 수많은 기대와 실망의 반복이 나를 주저앉게 하지만 금세 훌훌 털고 일어나 겸허히 출근하는 삶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