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부터 행복을 느끼는가
일상 속 행복의 흔적을 찾는 일
최근에 독서모임 선정도서로 <행복의 기원>이 채택됐다. 예전부터 “행복”이라는 마음의 상태에 줄곧 관심이 많던 나는 흥미롭게 책을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복은 인간의 최종 목적에 가깝다. 그러나 진화설의 주창자인 찰스 다윈은 행복을 생존을 위한 도구로 보았다. 나는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사실 생존이라는 목적을 향한 몸짓처럼 느껴졌다. 행복은 마치 차에 연료가 떨어졌을 때 충전하듯, 마음을 채워가는 일과 같다. 삶의 궤적 속에서 복합적인 감정들이 겹겹이 내 중심을 둘러싼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은 나를 행복으로 이끌기도, 때로는 슬픔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격언처럼 어떤 상태도 영원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어 한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은 과정 속에서 고통을 수반한다. 어느 연말,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로 지갑을 만들기 위해 가죽공방을 찾았다. 생전 처음 가죽의 감촉을 느끼고 마음에 드는 색상을 골랐다. 가죽 위에 초크로 표시를 하고, 재단하고, 바느질을 한다. 대바늘이 손에 찔릴까 등이 쭈뼛하게 서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완성이 되어갈수록 뿌듯함이 커졌다. 가죽의 모서리를 둥글게 무두질할 때는 먼지가 날려 콧물이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꼈다.
작업 말미, 지갑 앞면에 닉네임을 각인할 것인지 정해야 했다. 심플하게 아무런 닉네임을 새기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도 있었다. 내 이름의 철자 스펠링을 각인할까 고민하다, 자신이 만든 요리를 함께 먹자고 자주 집에 초대해 준 언니가 떠올랐다. 생일을 기억하고 손수 갈비 양념을 재서 LA갈비를 구워주기도 했다.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쌓았던 시간은 소중한 기억이었다. 어느새 나는 언니의 이름 스펠링을 지갑 앞면에 새겨 넣고 있었다. 선물상자에 지갑을 넣어 언니에게 건넸고, 초록색 지갑을 손에 쥔 언니는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순간을 이미 나 자신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물질을 손에 쥐어 얻는 기쁨은 찰나에 불과하다. 쇼핑을 통해 행복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물건을 손에 쥔 당일에는 바로 보물 1호가 된다. 그러나 일주일만 지나도 그 순간의 환희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회사에서 승진 발령문이 떴는데 주위 동료 중 아무도 나의 승진을 축하해주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자. 기쁨의 순간에 나의 기쁨을 함께 나눌 지인이나 친구, 가족이 없다면, 퇴근 후 홀로 이자카야에 들어가 사케 몇 잔으로 마음을 달래야 할지도 모른다. 그 술잔은 축하가 아니라 위로에 가까울 것이다.
요즘은 “각자도생”의 시대인지, 사회 초년생 시절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각자의 업무분장이 확실하게 나눠져 있어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을 쉽게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옆 동료의 일이 많으면 차마 외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민 끝에 일을 좀 나눠 처리해 주면, 동료는 저녁을 먹고 가자고 청했다. 우리는 회사 앞 닭발집에서 매운 닭발 한 접시와 막걸리로 오늘의 고생을 치하하며, 내일을 응원했다. 연애 이야기로 웃고, 입 주변에 빨갛게 묻은 양념을 지적하면서 깔깔 웃던 시간은 지금도 엔도르핀을 돌게 하는 경험으로 남았다.
결국 행복을 오래 지속시키는 건 사람이다. 아무리 개인주의의 시대가 만연한 시대라도, 사람만큼 사람을 채워주는 존재는 없다. 내면의 중심은 나에게 두되, 우리는 친구와 가족, 동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쌓아나가야 한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노년이 되어서도 과거를 회상하며, 그래도 살아볼 만한 세월이었다고 삶에 감사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