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지 않아도 추앙받는 삶
고양이에게 배우는 게으름의 미학
회사 정문 앞에 검은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가 오늘도 마중을 나왔다. 길고양이답지 않게 검은 털에서 윤기가 흐른다. 영국의 근위병처럼 충실한 자세로 출근하는 직원들을 맞는다. 그러나 한 발 다가서려 하면 금세 "미야옹~"하며 경계심을 표시한다. 적당한 거리를 존중해 달라는 듯 턱시도 고양이는 쉽사리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법원관리대원 옆에서 먹이를 달라고 "가르릉"거린다. 또는 장난감으로 놀아주는 응대에 앞발을 휘두르며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어쩐 일인지 요즘은 주변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내 주변만 그런 건지, 반려동물이 일상화된 세상인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 처지라, 반려동물은 엄두도 못 낸다. 그렇지만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자신이 키우는 반려묘의 사진을 보여주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고양이를 돌보는 일은 강아지만큼 분주하진 않은 모양이다. 집사들의 공통점은 다들 마음이 하나같이 여유롭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진 속 고양이들도 포실포실하게 살이 올라있다. 얼마나 공들여 모시는 건지 영양 상태가 하나같이 좋다. 햇빛이 거실 마룻바닥 위로 해시계처럼 길게 내리쬐면 그곳이 자신의 영역인양 바닥에 나른하게 누워 낮잠을 즐긴다. 이쯤 되면 "다음 생엔 이렇게 지극정성 돌보아 주는 가정집의 냥이로 태어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든다. 출근도 하지 않고, 돈도 벌어오지 않는 데 존재만으로 추앙받는 묘의 삶.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퇴근길에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길, 작은 규모의 인쇄소에도 고양이가 산다. 얼룩 젖소 무늬를 가진 녀석은 늘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행인을 훑는다. 미묘라 할 순 없는 찐빵처럼 눌린 얼굴이지만 그래도 애교가 있다. 가끔 인쇄소 밖으로 나들이를 나오면 녀석과 마주친다. 그럴 때면 내 다리 옆으로 엉덩이를 들이밀고 부비면서 스킨십을 한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서로에게 호감의 표시를 한다. 인쇄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번 쭈그려 앉아 유리창을 "톡톡" 두들겨 인사를 한다. 앞발을 들어서 나의 부름에 화답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마음씨 좋은 사장님이 사료를 듬뿍 놓아둔 그릇에 눈길이 간다. 또 다른 생명체를 위해 가진 것을 나누는 넉넉한 씀씀이가 보기 좋다.
내가 사는 집 뒤편 주차장 담벼락 위에서도 고양이가 종종 일광욕을 즐긴다. 담의 높이가 제법 높은 편인데도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 투실한 몸을 담벼락에 잘도 걸치고 있다. 요즘 구청 측에서 길고양이들을 위해 추적 시스템을 달아놓는 것인지 목에는 알 수 없는 인식표를 메달처럼 걸고 있다. 램프처럼 빨갛게 점멸하는 불빛에 호기심이 일렁인다. 사뿐사뿐 다가가서 목에 달고 있는 신호 장치를 좀 더 살피고 싶다. 그러나 녀석은 금세 양쪽 귀를 쫑긋하며 기척을 눈치챈다. 이렇게 예민한 반사신경을 가졌는데 무슨 수로 목에 인식표를 채운 것일까. 요즘 동네 골목마다 캣맘들이 길냥이들을 위해 보금자리와 캔사료를 갖다 둔다. 새끼를 밴 것처럼 뱃구레가 뽈록하게 불러있다. 이제 탐정처럼 고양이의 뒤를 쫓던 발걸음을 집으로 돌린다. 집에서 키울 수 없는 고양이에 대한 사심을 밖에서 가득 채우고 돌아간다.
고양이를 좇는 시선이 어느새 세계의 길고양이들로까지 확장된다. 언젠가 가고 싶은 나라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고르고 싶다. 바다를 둘러싼 동네의 지형도 좋고, 파란색 지붕에 하얀 건물, 그리고 새하얀 담벼락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다. 시원한 풍경의 한 편엔 고양이들이 주인처럼 거리를 거닐고 있다. 사람이 주인일까 고양이가 주인일까. 어쨌든 두 생명체가 어울리는 모습이 정겹다. 그곳에서는 서두르는 일 없이 느지막하게 일어나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을 것 같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내려 벤치에 앉아 느긋이 걸어가는 고양이를 언제까지고 바라보며 유유자적 하루를 보낼 것이다. 게으른 그리스의 한량으로 사는 것도 꽤 근사한 일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