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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Mar 28. 2018

호수를 왜 바다라고 불러?

갈릴리에서 로스코 만나기

"까마귀를 보라. 세상에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히 유금(乳金)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녹색 빛을 반짝거리기도 하고,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번득이다가 비취색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두고 푸른 까마귀라 해도 좋을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본래부터 그 새에게는 일정한 빛깔이 존재하지 않는데, 먼저 내가 눈으로 빛깔을 정했을 뿐이다.

어찌 눈으로만 결정했겠는가? 마음속으로 그 빛깔을 정한다."

박지원의 ‘능양시집 서문(菱洋詩集序)’ 중



이름의 배신이다. 바다라고 계속 불러왔거늘, 갈릴리 바다는 사실 민물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부르자면 ‘갈릴리 호수’가 되는 것이다. 어쩐지 아쉽다. 호수보다는 바다가 썩 낭만적인 느낌이란 말이다.


전경을 꽉 채우는 푸른빛 캔버스, 바닷가는 우리의 터전이 끝나는 지점이자 자연에게 다시 질서를 내어주는 곳이다. 이 파란 가리개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콜럼버스가 되어 상상을 해본다. 완전히 다른 문화가, 나와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자연은 얼마나 위대한지, 이 세상은 얼마나 넓은지, 바닷속은 얼마나 깊은지 생각하다 보면 그 앞에서 참 작기만 한 존재인 내가 조금 전까지 끌어안고 낑낑댔던 미미한 고민들은 바닷바람에 티끌처럼 가볍게 날아간다.  


그런데 그곳은 광활한 바다가 아니라 꽉 막힌 호수였다. 그 끝에는 신대륙이 아닌, 익숙한 옆동네가 있다. 호숫가를 따라 멀리 걸어봐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찾아보니 대략 54 킬로미터를 걸으면 갈릴리 호수 한 바퀴를 돈다. 물론 걷기에는 먼 거리지만 내 기억 속 넓디넓은 갈릴리에 비해서는 한참 작은 규모라 놀랐다. 그 어린 눈에는 지중해 바다보다도 갈릴리가 더 장엄했는데.


나는 그냥 갈릴리를  바다라고 불러주고 싶다. 고대 히브리어는 호수와 바다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yam)이라고 했다. 지중해를  바다라고 하고, 나머지는 작은 바다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번역상으로는 갈릴리를 바다라고 부르는 것에  오류가 는 것 아닌가.


그러나 기억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둥근 모습의 갈릴리는 영락없는 호수였다. 매주 아빠와 예루살렘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봤다. 호수를 둘러싼 구릉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호수 전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갈릴리라는 이름 자체도 ‘둥글다라는 의미다.  




호수는 매월, 매주, 매시간마다 색이 달랐다. 조금 흐린 날에는 어둠에 비춰 진했다가 쨍쨍한 날에는 햇빛에 비추어 밝게 반짝거리는 정도의 색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색 바뀜이 새까맘부터 새하얌까지 넘나들었으며, 어느 날은 누렇다가, 다른 날에는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위에 뜨는 무지개보다도 선명한 호숫물의 색들이 자연의 그 어떤 색깔이라도 모방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마법 같은 물이었다. 바다가 아니고 둘레가 있는 호수라서 갈릴리는 한눈에 꼭 담겼다. 둥근 캔버스 같았다.  


캔버스 위에 고깃배를 띄워 그물을 내리면 물고기 수가 줄어서인지 색이 연해져 노란 레모네이드가 되었다. 석양이 호수 위에  방울 떨어뜨린 물감처럼 번져갈 때면 캔버스는 루비가 되었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표면이 빛을 받아 반짝여서 더욱 그랬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풀향이 맡아지면 둥근 캔버스 위에 청록색으로 물든 숲을 보았다.


갈릴리 호수의 색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날의 호숫물 색과 상응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집에 가서는 물감을 섞어 갈릴리 호숫물의 색을 만들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는 날에는 연둣빛, 마음이 잔뜩 들뜬 날에는 강렬한 보라색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종이를 잘랐다. 둥그렇게 스케치북을 오려냈다. 날씨가 끄물끄물한 날엔 물감에 흠뻑 젖은 종이가 힘을 잃고 울었다. 엄마에게 꾸중을 들은 날은 성난 붓 자국으로 뒤덮였다.  


갈릴리를 상상하며 만드는 푸른색에는 그날 나의 기분이 함께 조색(調色)되었다. 쌓여가는 종이들 중 같은 색은 없었다. 갈릴리 호수는 나에게 다양한 생각들과 느낌들을 소통할 수 있는, 매일 새로운 색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낭만이었다. 갈릴리가 바다가 아니면 어떠랴, 나에겐 바다보다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느 미술시간에 마크 로스코에 대해 배웠다. 그의 그림들은 어떤 이미지도 없이 색채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캔버스에 자신이 만든 색을 칠하고  칠하며 작품을 완성했다. 비슷해 보여도 제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진 캔버스들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작품의 제목들을 숫자들로 지었다. 마치 내가 갈릴리 뒤에 날짜를 적어 놓은  같았다. , 어딘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을 감상할  눈앞에 색이 가득 차는 가까운 거리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방해되는 일들과 주변 환경은 잠시 잊은 , 캔버스의 색면(色面) 바라보면  속에서 영혼을 채우는 새로움을 느낄  있다고 했다. 보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같은 색이지만, 각자에게 말을   무한한 감정을 담은 작품이었다.  

No. 14 (1960)

명색이 화가인데, 몇 가지 색으로 캔버스를 슥슥 칠한 게 전부라니, 배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회화 중 하나인데, 하나도 그림 같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미묘한 색채장이 나는 낭만적이다. 볼 것이 없는데 비치는 것이 많아서 신비하다. 오렌지색 새벽이 어두운 밤하늘을 열고 퍼저 나가는 모습, 그리고 검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초저녁의 수평선이 보인다. 로스코는 저 수평선 너머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보다는 가장 익숙한, 내 마음의 풍경을 그려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갈릴리처럼 매월, 매주, 매시간 새롭다. 색을 보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보게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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