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문자cho Dec 03. 2018

파키스탄 선생님, 미즈 멀자(上)

    자랑할만한 사실 하나. 고등학생 때, 나는 개인 화실이 있었다. 그때만 잠깐 있었고 지금은 없다. 나의 작은 파키스탄 학교는 무척 넓은 학교라 남아도는 방이 많았고. 미술 선생님은 그중 하나를 나의 공간으로 선물해 주셨다.


    “저 건너편 블라인드 쳐진 방 있잖아, 90년대에 미술 교실로 쓰이던 방이야. 그땐 학생들이 많아서 여기랑 오가며 수업했지. 하마드(학내 관리인)한테 쓸 일이 있다고 했더니, 이틀 만에 열쇠를 찾았어.”


    무언가 신나는 일이 있을  깍지로 모은 손을 턱밑에 대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이셨다.  물건을  옮겨 놓았다고, 그러니 얼른 가서 구경하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초롱초롱한 눈빛과 함께 턱을 조금 들어 올리며 나를 재촉하셨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내가  교실을 나서려던 순간, “아니다, 같이 가자  다시 불러 세우셨다. 희희낙락 대던 학생들에게 별안간의 바리톤으로 짧은 경고를 던지셨다. “너네. 말썽 피우지 ”. 그리곤 핸드백을 챙겨서 총총걸음으로 따라나오셨다. 선생님은 서른을 넘긴 아들을 두셨는데 여전히도 소녀 같으셨다. , 성함은 ‘미즈 멀자(Mirza)’였다.


    “안쪽은   없지?  넓어.   개를 텄거든. 그러다가 이렇게까지  방이 필요 없어져서 옮겼지. 근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까  트인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전용 스튜디오로 만들기로 했어. 나무가 보이는 경관이 압권이야. 이제 미술실이 잠겨 있어도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작업을 하면 


    이런 설명을 들으며 십수 년간 인적이 없었던, 시간을 잊은 방으로 들어섰다.  벽면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는 재료들이 가지런히 모여있었다. 새것처럼 보이는 젯소도 한통 있었다. 수도와 난로도 있었다.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공간이 조금 휑하기도 했다. 바닥에는 널찍한 나무 패널이 깔려 있었다. 방바닥 전체를 덮는 크기였는데  틈이 가운데서 교차하는  보고  조각임을 알아차렸다. 방엔 이미 나무향배어있었다. 며칠  미즈 멀자에게 물었던 터였다.


“시중에 있는 가장 큰 캔버스는 얼마나 클까요?”

“160에 110. 이 도화지 네 개를 붙여놓은 정도의 크기.”

“종이로 사면요?”

“종이는 여러 개를 붙여서 사용하면 되지.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려고?”

“팔을 막 휘둘러야 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그려야 할 정도의 엄청 큰 그림이요.”

“벽화를 그려도 돼. 학교에 벽이 많잖아? 흠, 제일 큰 벽이 어딜까…”

“막 천장까지 이어지게 그려도 돼요? 미켈란젤로처럼!”

“하마드한테 사다리를 찾아오라고 할게! 너무 위험할 거 같으면 단상을 제작하라고 하지 뭐. 지금 당장 불러야겠어. 아악! 너무 재밌겠다!”


    미즈 멀자는 나의 즉흥에 맞장구를 는 분이셨. 수업만 끝나면 바로 교내 탐사를 가겠다고 하셨는데, 학교를 돌다가 교장 선생님과 마주쳐서 벽화 계획을 설명했더니, 다음  학교 축제의 배경으로 쓰고 싶다고, 노천극장에 그리라고 하셨단다. 마음이 시키는 일은 언제나 조금 갑작스럽게 진행된다. 나는 속으로 결과물이 변변찮으면 굉장한 망신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조금 어질해졌다. 그리고 어렴풋이 신나는 기분도 들었다.


    미즈 멀자는 노천극장 벽의 치수를 재서 딱 맞게 나무 패널을 제작하셨다. 목공소까지 가서 말이다. 행사가 끝나면 옮겨서 전시할 수 있게, 조립이 가능한 네 조각으로. 그리고 밖에 두면 철없는 중학생들이 밟을 게 걱정이라, 남는 중 제일 넓은 방에 옮겨두셨다. 나무가 생각보다 많이 무거워서 벽에 어떻게 걸어야 할지가 아직 고민인데 그건 하마드가 해결해줄 거라며, 걱정도 아니라고 하셨다. 처음엔 하마드가 구멍을 뚫겠다고 해서 작품에 그건 안된다고 따끔하게 일러놨다고, 그래서 여기에 무얼 그릴 거냐고, 나에게만 살짝 말해줄 수 있냐며, 눈을 맞추고 턱밑으로 양손을 슬며시 올리셨다.


    거기에  그렸냐면, 화실의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그렸다. 신발을 벗고  판자에 올라가면 자주 시간을 잊었다. 화실이란 오래 머무르는 곳이고, 각종 애착품들이 필연적으로 집결하는 곳이었다. 나는  방에 소금 식초  감자칩과 마일로 초코 우유를 쟁여놓게 되었다. 둘러싼 자연 같은 것도 화실엔 중요하다. 그래야 순간을 그려서 기록하고 싶은 시간들로 채워질테니.


    화실이 여느 공간과 다른 이유는, 공간과 그런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파리 그랑 조귀스탱가 스튜디오를 빛이 잘 든다고 좋아했다. 파리를 떠난 이후에도 누구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유지할 정도로 깊이 좋아했다. 세잔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 사방이 창문으로 된 자신의 아틀리에를 직접 설계하고 꾸몄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마티스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4부작의 화폭에 담았다. ‘빨간 화실’, ‘분홍 화실’, ‘화가의 가족’, ‘가지가 있는 실내’로 이루어진 애정의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진짜 자랑은 이것이다. 안식처이자 일터, 친구이자 피난처, 그런 공간을 선물 받는 일이 얼마나 멋진 지 안다는 것. 그걸 알려준 스승이 있다는 것. 나는 오직 고마움으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작가의 이전글 파란만장 눈물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