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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Dec 03. 2018

파키스탄 선생님, 미즈 멀자(中)

    솔직한 말들은 대게 아슬아슬한 말들이다. 마음껏 솔직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 전에 목구멍에서 삼켜버려야 한다. 그런데 후에 입을 쥐어뜯을 걱정 없이 평가를 뱉어내도 되는 상대가 있었으니, 내 손으로 창조한 것들이 유일하게 그렇다. 자평은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비판.


    미즈 멀자가 가르쳐주신 그림을 완성하는 방법은 이랬다. 일단, 오늘 그리고 싶은 걸 그린다. 하루의 영감을 받아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내 붓이 가는대로, 물감이 흐르는 대로. 그리고 잠시 넣어둔다. 오늘의 일은 잊어도 된다. 며칠 후에 다시 캔버스를 꺼내서 멀찍이 세워둔다. 몇 발짝 뒷걸음친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바로 세우고 바라본다.


    일견에는 저 붓터치를 만들어 냈을 그날의 나와 마주했다. 조금 뒤에는 그 질감과 촉감에서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내가 보였다. 미완의 과거는 현재의 시선을 거쳐 가공될 것이다. 기묘했다. 분명히 내가 그린 그림인데, 오늘 바라보니 영 다르게 했다면 좋았을 걸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나는 점점 이 방법에 빠져들었다.


    “어때?” 내 그림에 대한 평가를 선생인 자신이 아닌, 오직 나에게만 묻는 미즈 멀자셨다. 나는 스스로 어디가 부족한지, 어디가 비율이 이상한지, 어디가 조화롭지 않은지 짚어냈다. 또, 어떻게 바꿔보면 재밌을지 쏟아냈다. 미즈 멀자의 화실에서는 솔직함을 억압할 이유가 없었다. 내 취향을 맘껏 반영한 비평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것 봐, 몸통만 기형적으로 커” 제 그림에 손가락질하며 키득댔다.


    못난 부분도 부족한 부분도 고치면 그만이었다. 덮어서 그리고 오려내 버렸다. 누구와도 상의할 필요는 없었다. 이유도 설명할 필요 없었다. 나는 창조자니까. 내 안의 충동이 속삭일 땐, 이 작품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까지 온전히 나의 권한이니까.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피카소의 말을 떠올렸다. 나의 변덕도, 나의 실수도, 모두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되는 작은 영역. 그 작은 캔버스는 나의 온전한 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내가 미술에 빠지게 된 것은 실력을 다지거나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는 동기보다는, 어떤 자기권능감을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미술만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내 마음대로’의 실현을 사랑했다. 미즈 멀자가 가르친 예술이란, 그런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는, 내 멋대로의 행위. 변화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나의 오롯한 감성의 시현.

    

    타인을 의식해야하는 건 짐짓 표현의 코르셋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붓은 혀와는 달라서 완벽하게 놀리지 못해도 세상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곳에선, 그곳에서만큼은, "왜?"를 묻지 말자. 신중을 덜어내자. 캔버스 앞에선 나의 시선만이 기준이 된다. 이곳에서 나는 '소현 올마이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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