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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Nov 30. 2018

파란만장 눈물길

    나는 긴장이 되면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나버리는 사람이다. 작은 감정 하나에 그 자리에서 와앙 울어버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초등학생한테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고, 어디서나 당차게 발표하던 어린이였다. 우물대고 숨어버리는 애들은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즈음이었나, 어느 날부터 얼굴이 화끈거리며, 온몸이 저릿하고, 속이 참을 수 없이 울렁거리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오늘날까지 추적해낼 수가 없지만 나의 모습 중 가장 통제하기 힘든 골칫덩이가 되었을 뿐이다.


    이십 대의 중턱을 넘어버린 지금까지 이 변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불편하기도 불우하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여섯 번의 대입 면접을, 두 번의 동아리 면접을, 수많은 어른들과의 만남을, 그리고 한 번의 입사 면접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이번엔 다를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기대를 걸어봐도 늘 똑같았다. 그 끝에 나는 혼자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고 짓찧고 있었고 쥐구멍 대신 집으로 줄행랑쳤다. 교수님은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까, 얼굴 벌게진 나는 얼마나 찌질해 보였을까. 으아아아악! (내적 괴성) 일동 얼어붙은 면접관들의 표정, 그리고 슬며시 휴지를 건네던 그 조심스러운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깬 채로도 악몽을 꿀 수 있다. 주책이라며, 그렇게 여러 밤 스스로를 원망했다.


    사람들의 이목 앞에만 서면 눈물의 대굴욕을 생성해대는 고질 버릇을 앓는 주제에 오랜 꿈이 뭐였는지 아실지? 뮤지컬 배우였다. 이를 가엽게 여기시던 엄마의 원조를 받아 보컬 학원도 다녔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발성을 익혀가도, 막상 오디션장에서 눈두덩이가 조금 불긋해지고 눈에서 물 같은 것이 떨어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삑사리는 안났는데, 저번처럼 파르르하지도 않았는데. 잘 부르고 있다가도, 눈물 꼭지가 열리면 심사위원들은 난데없는 체액의 등장에 주의를 뺏겨 더 이상 내 노래에 집중해주지 않았다. 벌벌 떠는 이상 체질은 오디션 상황에서 유난히 비극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미국에 있었는데, 학교 연극반에서 학기마다 뮤지컬을 한 편씩 올렸다. 그때마다 자그맣게 오디션 공고가 복도에 붙었다. 에이포 용지 사등분 정도의 크기.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칠 정도였지만 아무리 작아도 내 시선만큼은 그 앞에서 멈춰 섰다. 묻어두었던 작은 꿈이 꿈틀댔다. 그 깊은 곳에서 작은 용기를 찾아 꺼냈다. 그건 나를 매번 오디션장으로 이끌었고, 그렇게 연극반에 아는 사람도 없으면서 매 학기 오디션에 개근했다. 철만 되면 나타나는 것 같아 무진장 뻘쭘했다. 매번 비슷하게 낙방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나는 애써 울음을 참다가 목이 잠기느라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느라 공개 오디션을 자주 망쳤다.


    딱 한번, 주연급 콜백에 붙었다. 약간 믿기지가 않으면서도 지구를 뿌실만큼 좋았는데, 통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창작극 이랬는데 연극반이 아니라서 작품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어떤 역이 있는지도, 나를 어떤 캐릭터에 염두하신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누구보다 자신 있고 씩씩한 목소리로 지정 대사를 읽었는데, 극 중 제일가는 소심이의 대사였다는 걸 후에 알게 되었다. 우물쭈물 읽어야 했던 거다(사실 그거 내가 제일 잘하는 건데요).


    내처 실패만 하면서도 얼굴 도장을 찍다보니 대기실에서 말 붙일 친구가 하나 둘 생겨났다. 인맥도 길이라면 길. 충성스러운 인력으로 미술팀과 메이크업팀에 수급되다가 앙상블에도 자원했다. 하루 종일 대기해서 달랑 한 신 연습하는 날에도 나는 너무 행복했다. 나라면 어떻게 연기했을까. 어떤 신박한 애드리브를 쳤을까. 대사가 생긴다면 어떤 색 형광펜으로 그을까. 감정별로, 아니면 중요도별로, 여러 색으로 그었을까? 극 중 이름이 생기면 대본 책에 내 이름 대신 써야지. 그게 간지니까. 이런 상상을 하느라 행복했다.




    그러다가 이번엔 파키스탄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이 학교로 말하자면 서른 명 내외의 작은 고등학교였는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부 합쳐도 백 명이 안 되는 학생들을 위해 삼만 평의 대지와 교육 인프라를 운영하는 학교였다. 왕년에는 제법 큰 규모의 국제학교였다는데, 시내 호텔에서 큰 폭탄테러가 있은 후 외국 가족들이 전부 철수하는 바람에 국제학교라는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파키스탄과 인도 국적 학생들이 반반을 이뤘다. 모두 한국인 전학생을 살뜰히 챙겨주었다. 어느 날은 친구가 오늘 오디션에 함께 가겠느냐고 물어왔다. 귀가 쫑긋했다. 친구는 학교 끝나고 소극장에서 오디션이 있는데, 관심 있으면 가자고 했다. 아마 다들 갈 거라고, 이번 학기는 뮤지컬 ‘미녀와 야수’를 올린다고.


    소극장은 무대의 조명이 두어 개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밝기로 실내를 감쌌다. 객석엔 예닐곱 명이 좌석에 등 붙이고 앉아있었다. 양옆 친구와 수군대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런 가벼운 공기가 흘렀다.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극장 내에 찬찬히 울렸다. 두 분의 선생님이 한쪽에서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분은 교감 선생님이셨고 한분은 음악 선생님이셨다. 사족이지만 두 분은 며느리와 시어머니 지간이기도 했다.


    지원서가 피아노 위에 쌓여있었다. 벨과 포츠 부인, 둘 중 희망하는 배역을 선택하라고 쓰여있었다. 중복지원도 가능하단다. 다른 역할들은 어쩌고 두 주연 사이에서 고르라니. 나는 최대 먼지떨이 바베트 역 정도를 희망했던 터라 조금 당황했다. 일단 어느 쪽도 나에게는 가당치 않았다. 포츠 부인(주전자)은 매우 푸근하며 성량이 풍부해야 하고, 벨은… 글쎄 벨은 일단 미녀가 아니던가.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서구적인 미를 지녀야 한다. 게다가 홀로 극을 이끌어가다시피 하는 주인공이고, 노래도 아주 많이 불러야 하는데, 나는 울보인 데다가 ‘앙상블 #6’ 정도나 해봤던 거다. 결국 벨도 체크, 폿츠 부인도 체크, 나머지 배역을 맡을 의향에도 모두 체크 표시를 했다. 될 대로 될 테지. 며느리와 대화를 마친 음악 선생님이 벨 오디션부터 진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가슴께랑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려왔다. 손끝 발끝은 빠르게 얼음장이 되었다.

 

    벨의 오디션 대본을 펼쳤다. 야수가 죽는 장면, 그러니까 야수가 중상을 입고 죽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그 불후의 명장면이었다. 진정한 사랑의 고백에 야수가 마법에 풀려서 왕자로 돌아오는 장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 모두가 돌아가면서 연기해보기 시작했다. 비로소 깨우친 사랑과 죽음 앞에서의 애절함은 극의 절정을 조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차례가 되어 마구 두근거리는 채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안돼! 안돼... 죽지 마....”


대사를 친 순간 귀로 흘러온 내 목소리는 너무 많이 떨렸다. 홀로 무대에 우뚝 서니 낯선 새 학교가 한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 공간에 압도 당해버렸다. 거기에 새 친구들이 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지 않길 계속 기도했건만, 결국 물꼬가 터졌다. 눈물은 통제불능으로 쏟아졌다. 한번 억압 신경이 풀려버린 떨림은 나를 정신없이 지배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왔다. 들킬세라 재빨리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힘겹게 다음 대사를 입 밖으로 밀어냈다.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고 선생님의 반응을 올려다본 순간, 나는 직관적으로 어떤 성공을 예감했다. 목소리가 미어져 대사가 여러 갈래로 깨진 게 내가 듣기에도 꽤 멋졌다. 나는 진짜 울고 있었으니까. 선생님은 우연이었을지 실력이었을지 모른 채 나를 ‘벨’로 발탁하셨다. 그 해, 파키스탄의 ‘벨’은 연기력으로 둔갑한 오랜 고질병의 덕을 보았다. 어쨌건 성공이었다.


    언감생심 뮤지컬 주연 자리를 가져다준 작은 파키스탄 학교는 이후에도 나의 꿈을 원 없이 펼쳐주었다. 이듬해에는 선생님께서 나에게 극 연출을 맡기셨다. 용기를 내서 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던 무력함이 잊혔다. 열정만 있으면 뭐든지 시켜주던 학교였으니까. 너무 하고 싶은데, 시켜주는 이 없을 때의 설음, 그 실패의 짐을 한가득 내려놓았다. 여러 해 오디션장에서 흘려두었던 눈물길은 이윽고 악몽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날을 기점으로 골칫덩이 눈물샘을 미워하기만은 어려워졌다. 잘 우는 나라서 조금 행운일 때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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