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저에게 여행은 영화입니다. 시작과 끝, 그리고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도 이와 비슷한 특징을 지녔지만, 이야기를 구현하는 방식에서 영화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텍스트만 있으면 되는 소설과 달리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세트를 만들고, 촬영하고, 영상을 편집한 뒤 다시 세트를 해체해야 하죠.
저는 몇 년 동안 건축디자이너로 일하며,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에 구현하는 과정이 얼마나 수고롭고 번거로운지 체감해 왔습니다. 영화의 이러한 점이 여행과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대와 상상 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지루한 이동시간을 견뎌 마침내 현장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도착한 현장에는 수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어, 그에 맞춰 이야기를 급하게 수정하기도 합니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은 마치 영화 세트를 해체하는 것처럼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여행은 서서히 편집되어 나만의 영화로 완성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여정을 의식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여행의 기억은 흐릿해지고, 강렬했던 장면만이 머릿속에 드물게 남게 됩니다. 영화의 편집이 콘티만큼 중요한 것처럼, 여행 후의 정리도 계획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잘 정리된 여행은 이후 여행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책을 통해 얻는 간접 경험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다가옵니다.
바야흐로 ‘대여행시대’입니다. 코로나 시국이 전생처럼 느껴질 만큼, 많은 사람들이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류에 발맞추어 수많은 여행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콘텐츠가 여행지의 정보와 과정에 집중할 뿐입니다. 정작 우리가 왜 여행을 떠나는지, 여행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부족한 듯합니다.
과열되는 여행시장에 비판을 가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소비는 경험이 아니다. 여행은 단순한 소비일 뿐이다. 여행에서 느끼는 쾌락은 성행위와 비슷하다. 여행 또한 중독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의견에 일부는 동의하지만, 일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솔직하게 생각해도, 지난 10년 동안의 제 여행이 쾌락과 소비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쇼핑, 음주, 흡연 등 단기적인 쾌락과는 그 깊이와 지속성이 다르다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미디어와 자본이 만들어낸 사회적 유행일까?라고 생각해 보니, 아니더라고요. 당연하게도 여행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문화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여행을 더욱 진지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여행 중독인 걸까?' 같은 깊이 있는 질문부터 '여행 중 먹었던 가장 기억에 남은 음식은?' 같은 가벼운 질문까지. 17편의 글과 17가지의 '여행 질문'을 통해 지나간 여행을 되돌아보고, 저보다 앞서 여행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온 사람들의 의견을 구할 예정입니다. 마지막 챕터에는 프롤로그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여행의 이유'를 다룰 예정인데, 17개의 질문을 마친 후 저의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앞으로 이 책이 저를 포함해 많은 독자들이 더 나은 여행을 경험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