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우 Chociety Jan 09. 2023

29살 택배기사 이야기를 마치며

이전 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는 택배 일을 하기 전 히키코모리였다.

스물일곱, 믿었던 사업 동료에게 사기를 당해 1억에 가까운 돈을 잃고 공황장애가 온 뒤로 모든 의욕을 잃고 집에 틀어박혔다. 틀어박힌 1년 반 동안 나는 밤낮이 완전히 바뀐 채로,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른 채 하루 종일 누워있고 때때로는 허무한 글을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잃었다. 매일 샤워를 하던 내가 머리는 3-4일에 한 번 감고 이를 이틀에 한 번 닦을 정도였다.     


택배 일은 그런 내가 세상에 나온 뒤 처음 도전했던 일다운 일이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걷고 뛰면서 책임감이 생기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욕이 생겼다.

그 결과 지금 또 다른 사업을 준비해 매일 즐겁게 달려 나가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택배기사들이 처음부터 택배기사였던 것은 아니다.

사업을 했던 사람이 가장 많고, 다들 각자의 이유로 택배 일을 선택해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택배 일을 했던 시절의 나와 같이 많은 택배기사들이 누구보다 책임감을 갖고 하루하루 열심히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돈 버는 많은 일 중 왜 하필 택배였을까?

문득 과거의 내 선택이 궁금했던 적이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고등학생 때 당장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 처음 한 알바가 주유소와 택배 상하차 그리고 택배 배송 알바였다.

그렇게 택배를 시작으로 열심히 모은 기초 자금으로 사업을 시작해 자리를 잡아나갔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택배는 나에게 있어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고단하기는 해도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무슨 일이든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초심의 상징’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다시 하기로 다짐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고생을 사서 한 것 같기도 하다.

분명 몸은 더 편하고 돈이 되는 다른 일들도 있었을 터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오기로 결심한 나는 오히려 고생을 사서 하고 싶었다.

고단한 하루하루를 쌓아나가다 보면, 히키코모리 기간 동안 연약해진 마음이 단단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땀 흘려 세상으로 나오면 보다 성숙한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택배는 절박함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에 수천 계단을 오르며, 비가 오면 우산을 쓰는 것은 사치다.

한 건이라도 더 빨리 배달하려면 세찬 비로 그대로 샤워를 해야 한다.

비를 가려도 배달하는 택배 상자를 가리지 내 몸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래도 웃었다.

지금 이 고생은 성공의 가장 기초적인 체력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일 그만둘까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그만두기에 나는 너무 절박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힘들다고 그만두면 세상에 다시 뛰어드는 일 자체를 그만두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고달픈 하루하루를 쌓아나가 나는 내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체질을 매일 만들어 갈 것이라고.

그렇게 결심한 후부터는 힘들어서 그만두겠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꾸준히 한다는 것은 승자의 체질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두더라도 일이 쉬워진 후 그만두겠다 마음먹었다.     


나는 택배가 육체노동이어서 하찮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표로 내 사업을 해나갈 때나 마찬가지로 이 일에 최선을 다했다.

택배기사로서 상자가 아닌 마음을 전한다는 각오로,

상자 하나하나에 나의 마음을 쏟아부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하니 빨리 다시 나온 세상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혹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조급함은 조금씩 사라졌고 나중엔 이 일을 즐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편리하고 즐거운 삶을 선사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택배기사는 누구나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에서는 ‘택배기사’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사회적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했다.

처음에는 물건 배달에만 집중했지만 나중에는 고객과 내가 모두 좋은 효율적인 배송을 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업무 프로세스를 만들고 환경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이것이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가 맡은 자리는 훗날 대학교만 하더라도 상차와 배송시간을 합해 하루 3시간만 일해도 월 250은 챙겨갈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그 덕에 나는 어딜 가든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택배의 꽃인 집화에도 관심이 생겨 개인적으로 집화 전문 사이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택배를 그만둔 후에도 사이트를 본 쇼핑몰에서 집화를 맡기겠다는 문의전화가 여기저기서 걸려왔다. 얼마 전에는 한국조폐공사에서 금을 배달할 수 있냐는 문의와 김포에서 한 달에 2만 개 집화를 맡길 수 있냐는 문의도 왔다.

집화 2만 개는 단순 계산을 해도 한 달에 1,200~1500만 원의 돈을 벌 수 있는 계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집화건을 김포에 있는 얼굴 모를 택배기사에게 무상으로 넘겼다.

이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생겼기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업에 대한 구상은 택배를 하면서 하게 됐다.

운전을 하고, 걷고 뛰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예전에 알던 지식 그리고 잠재의식 속 증오를 비우고자 했다.

나에게 돈을 갈취한 예전 사업 동료에게 소송을 하며 차올랐던 그 증오와 분노부터 먼저 비워내게 됐다.

마음이 조금 평안해진 뒤에는 유튜브를 듣게 됐다.

유튜브로 긍정적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다.

처음에는 시간이 남고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 한 번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자꾸 자꾸 듣다 보니 나의 자아에는 균열이 왔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나보다 더 힘든 일을 겪어도 성공한 사람이 많구나

성공해서 나같이 한번 절망해 봤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도 있구나.

그렇게 나의 뇌는 조금씩 변했던 것 같다.

옛전, 사람과 돈에 상처받기 전 품었던 꿈들이 꿈틀거렸다.

내가 원하는 삶은 뭐지?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지?

모든 돈을 잃고 2년 6개월이 지나서야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되었고, 예전의 패기 있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품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내가 믿는 대로 세상은 달라진다."

돌아보니 택배기사 일은 내 마음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채우는 과정이었다고도 생각된다.     


브런치에는 좋게 써놨지만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 그리고 부상이 있었다. 운전하며 울타리와 표지판을 박은 적도,

택배차 뒷문을 열고 도로를 주행한 적도 있고, 벽에 부딪혀 택배차 뒷문이 망가진 적도 있다.

물건을 잃어버린 적도 있고, 초반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객에게 연거푸 사과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21년에는 비도 많이 오고 담당구역에 도로공사도 많았는데, 유독 자주 미끄러지고, 무거운 짐을 들다 넘어져 발목 부상이 많아 택배를 하다 한의원에만 20번을 넘게 갔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잠시, 나를 성장시킬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렇지만 택배 하시는 분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무슨 일이 있을 줄 모르니 뛰지 말고 천천히 다니시라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가장 밑바닥부터 오른다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나를 바꿔나갔다.

강남 바닥에서 대표소리를 들으며 월 수천만 원씩도 벌어봤지만 진정한 성공에 대한 비전이 없던 예전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택배를 하며 학점은행제 심리학사 학위를 받아 형식적으로나마 고졸에서는 벗어나게 되었고, 택배기사를 하며 시장과 관공서장을 포함해 사회에서 총 13개의 상을 받았다.

그전에도 이런저런 상이며 위촉장을 받은 적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내 인생에서 받은 상장 개수가 100개를 넘게 되었다.

아침마다 명언을 읽고 자기 계발을 위해 유료 강의를 20개 넘게 500만 원어치 결제해 듣기도 했다. 땀 흘려 번 돈이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택배를 통해 오히려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나의 꿈 내가 꿈꿔왔던 업, 내가 앞으로 할 일들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나의 미래를 제한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 나를 방 안에 가둔 것도 바로 나였다.

이제 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택배를 그만두었다.

평균적인 직장인보다 수입도 높고, 일도 익숙해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만둘 때라는 생각이 되었다.

나의 초심이자 나를 단단하게 만들던 일이 어느 순간 ‘Comfort Zone’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세계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택배기사는 좋은 직업이었고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었지만 사업가로서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꿈이 더 커졌다. 세상이 두려워 집에 박혀있었던 과거의 나라면 ‘여기만큼 더 돈 되는 일이 있을까? 나가면 후회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나를 제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끼리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일 때, 어린 코끼리를 말뚝에 묶어놓는다고 한다.

아기 코끼리는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려 하지만 연거푸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실패의 경험이 반복되면 코끼리들은 더 이상 말뚝을 뽑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어느새 훌쩍 자라나 말뚝 따위는 발길질 한 번에 뽑아버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도 말이다. 인간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실패의 기억 때문에 현재나 또는 미래에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더 큰 우물로 나아가자!     


택배 일을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하면서 내 과거를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 택배 기사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에세이를 쓰면서 보니 요새는 MZ 세대가 '손노동'에 빠졌다는 뉴스가 많이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읽은 것으로 유명한 <쇳밥 일지>가 정통 문학 출판사인 문학동네에서 출판되는 등 청년의 육체노동이 예전보다 진지하게 다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를 환영하며, 쇳밥 일지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문장을 하나 인용해 본다.     


내가 생각하는 좀 더 좋은 세상이란 노동이 단지 생존을 위한 수렵활동처럼 여겨지지 않는 세상,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세상이었다. 대한민국은 청년에게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 - 쇳밥 일지 중     


인생은 내가 나를 제한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꿈꾸면서 실천하면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사회도 마찬가지다. 구성원들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고, 마음껏 꿈꾸고 실천하면 잘못됐던 부분도 바로 잡힐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꿈과 더불어, 이 사회의 변화도 꿈꿔본다.

청년이 어떤 노동을 하더라도 당당하고 자부심 있게 하는 날이 오기를.

고졸이든, 육체노동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모든 청년들이 그 어떤 꿈이든 크게 품고 도전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택배기사가 본 직업의 귀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