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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색담요 Jun 25. 2021

그녀의 따뜻한 관심 안에서

배우 황보라

배우 황보라와의 대화가 끝난 후 눈앞이 캄캄했다.

리코더의 상태화면이 기침을 토해내듯 몇 번 깜박이더니 그대로 사망해버린 것.  한 시간 넘게 인터뷰한 녹음파일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취재원과 눈빛을 교환하고 자연스럽게 장단도 맞춰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는 인터뷰하며 메모도, 타이핑도 하지 않는다.  녹취만이 인터뷰 내용을 복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그녀와의 대화가 저장된 곳은 오로지 내 머릿속 밖에 없게 되었다. '역시, 기계는 믿을만한 게 못돼'라는 원망을 할 겨를도 없었다. 여덟 페이지짜리 분량의 기사를 무슨 근거로 써야 하나라는 걱정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인터뷰 장소인 렌탈스튜디오의 앞마당에는 밝고 고운 봄햇살이 가득 내리쬐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탐스러웠다. 사진을 찍기 위해 벚꽃나무 아래에 선 배우의 표정은 봄날씨만큼이나 말갛게 피어났다. 배우가 유쾌발랄하니 현장 분위기도 좋아 사진작가와 소속사 스태프들의 웃음소리가 마당 이곳저곳을 또르르 굴러다녔다. 오로지 나만, 어둠 속에 서있었다.

'중요한 대화내용이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지? 생각나는 질의응답을 모두 써도 기사분량에 못 미치면 어떡하지? 서면으로 보충취재를 요청하면 배우 측에서 크게 언짢아 할까?' 별의별 고민이 다 들어 남은 사진촬영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소속사 측 홍보 담당자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혹시 오늘 인터뷰 소속사에서 따로 녹음하진 않으셨죠?" "네. 왜요?" "아무래도 녹음이 안된 것 같아서요." "어머! 어떡해요?"


소속사 직원들과 배우도 오늘 나눈 대화가 공중분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너무 미안하고 민망했지만 짐을 여럿과 나눠 든 기분도 들어  아주 조금쯤은, 기분이 나아지는 듯 했다. 하지만 진짜 위로가 되었던 건 배우의 말들과 표정이었다. "오늘 대화 정말 즐거웠는데, 사라져서 어떡해요! 너무 속상하시겠어요. 그래도 기자님,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컴퓨터에 연결하면 파일 다시 살아날 수도 있어요. 정 안되면 서면으로 다시 답해줄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씩씩하게 얘기하는 그녀의 말들이 귀에서 귀로만 흐르지 않았다. 중간, 마음 속에 머물렀다 가는 말들이 나를 조금씩 진정시켰다. 


타인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항상 남보다는 내 상황이 먼저이고,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당사자 뿐이라는 생각에 남의 일에 대한 관심도는 살면서 점점 낮아진다. 하지만 직접 해결해주지 못하더라도 진심 어린 관심만으로도 상대가 얼마나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는지 배우 황보라를 통해 새삼 느꼈다. 내가 전해 느낀 따뜻함에 비해 녹음 파일을 날려 먹은 상황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그리 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의 어두운 낯빛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 '저 사람 어떡하냐'는 생각만 하지 않고 '괜찮다, 걱정 말라'고 표현을 해주었다는 것만으로 고마웠다. 

헤어지면서까지 "기자님, 컴퓨터에 연결해보고 결과 꼭 알려주세요. 궁금하니까!"라며 그녀가 보여준 관심의 기운을 받아서일까. 천만다행으로 파일이 살아 있어, PC용 복구 프로그램을 이용해 다시듣기를 할 수 있었다.


봄햇살보다 따뜻했던 그녀의 따뜻했던 말이 매년 벚꽃잎과 함께 내 눈앞에 흩날릴지도 모르겠다.


사진 : 타이거포토스튜디오


 


누구에게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코믹 연기로 큰 획을 그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그러자면 평소에 더 많은 사람과 만나 어울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요즘에는 등산객들이랑 ‘서로 찍어주기’하는 데 재미를 붙였어요. 지나는 분들에게 “죄송한데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저희도 찍어드릴게요” 해요. 그 사진을 제 SNS에 올리면 ‘그날 사진 찍어준 사람이에요. 너무 반가웠어요!’ 하고 메시지 올 때가 있죠. 저도 친구처럼 반가워서 꼭 답장을 하고요. 그렇게 뜻밖의 인연이 생기면 일상에 색다른 이벤트가 열린 기분이 들어요.


아름답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삶이 있으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싶거든요. <인간극장><사노라면> 같은 휴먼다큐란 휴먼다큐는 다 챙겨봐요. 하지만 길에서 마주하는 삶의 모습들은 화면 속 장면과 차원이 다른 감동을 줘요. 특히 하와이 마라톤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봤어요. 아이의 보폭에 맞추며 걷는 아버지, 휠체어 탄 채 땀 흘리며 움직이는 아저씨, 웨딩드레스랑 턱시도 입고 손잡고 걷는 커플….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제가 딛고 있는 길 위에서 펼쳐지는 삶이 진정 아름다운 장면이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싶어 걷기에 욕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걷기를 무슨 거창한 사명감이나 의도를 갖고 실천하는 건 아니에요.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한 감사함. 그게 제가 길 위에서 얻는 가장 큰 선물인 것 같아요. 하와이에서 10만보 걷고 나서도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와, 정말 형언할 수 없이 시원하고 달콤하더라고요. 물 한모금도 걷는 와중에는 너무 소중해요. 그렇게 감사한 것들이 자꾸 늘어나니까 사람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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