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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아리 Jan 25. 2023

세부 0000 호텔인데, 아이 기침약이 없어요.

세부에서 생긴 일


이제 막 5살, 6살이 된 아이들과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아이들은 첫 해외여행이라, 가기 한참 전부터 잔뜩 신이 나있었다. 나 또한 약 5년 만의 해외여행인지라 신이 났지만, 해외에서의 돌발상황에 대한 두려움도 앞섰다. 아이들과의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박 5일 중 2일 차 저녁, 둘째가 기침을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세부 날씨 때문이었다. 하필 2일 차 날씨는 요상해서, 등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덥다가도, 갑자기 바람이 불어 추워지기도 했다. 아이는 잠에 들어서도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 나는 덜컥 무서웠다. 이 낯선 곳에서 아이가 아프다니. 상상도 하기 싫은 전개였다.


재빨리 병원에서 타온 상비약 봉투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하필 기침약만 없다. 가래약, 콧물약, 해열제, 지사제, 소화제 모두 있는데 말이다. 일단 급한 데로 가래약이라도 먹여볼까 하다가 문득 유명한 세부 여행 카페가 떠올랐다. 여행 전부터 호텔, 항공, 마사지 등 세부 여행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얻었던 곳이다.


마침 그 카페에 들어가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이 '호텔 이름'과 함께 처지를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글들이 꽤 보였다.(선크림, 튜브 등 한국에서 깜빡하고 놓고 온 물건들을 구하는 글들이 종종 보였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어 글을 올렸다.

[세부 0000 호텔인데, 아이 기침약이 없어요.]


글을 올린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렸다. 본인도 그 호텔인데 내일 떠나니 나에게 기침약을 주겠다는 글이었다. 나는 거의 울듯이 웃으며 만나기로 한 호텔로비로 갔다. 기침약을 건네주는 아이 엄마에게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고는 돌아가려는데, 나를 붙잡고는 기침패치가 하나 남았는데 그것도 혹시 모르니 주겠다며 본인의 방으로 가자고 한다. 평소에도 효과가 좋았던 기침패치였던지라, 그 또한 넙죽 고맙다며 따라가 받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그제야 한숨 돌리는데, 내가 올린 카페 글에는 댓글이 여전히 달리고 있다. 본인도 기침약이 있는데 아직 여행 날짜가 많이 남아 공병을 가져오면 나눠주겠다는 댓글, 기침패치가 있으니 혹시 더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댓글, 아이는 괜찮냐는 댓글 등. 마음이 뜨끈해졌다.


한국 엄마들 참,,,


재빨리 쓴 기침약 덕분인지, 아니면 엄마의 호들갑이었던 건지, 아이는 다음날부터 기침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기침약과 기침 패치를 건네준 엄마도, 나에게 언제든 연락하라며 댓글을 달아준 엄마들도, 나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단지 낯선 해외에 함께 있는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를 키우는 '한국인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과분한 친절을 베풀어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어디를 가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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