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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타니 보이는 것들

by 둥아리


한 달 전 즈음, 언제부터 어린이집을 빼고 놀러 가고 싶다던 아이를 위해 결심한 날이었다. ‘오늘은 어린이집 땡땡이치는 날!’ 아이와 어디를 갈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선택지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일단 날씨가 너무 추우니 실내여야만 했고, 내가 운전을 못하니 아이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여야만 했다. (운전을 어느 정도로 못하냐면 운전면허 도로주행에서 다섯 번 떨어지고 붙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집 앞 백화점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구경하며 놀까, 아니면 아이가 좋아하는 집 근처 키즈카페를 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엔 아이와 매일 하던 것들 말고, 특별한 경험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 번도 안 타본 지하철을 함께 타보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재밌고 신나는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계획은 지하철을 타고 4 정거장 떨어진 복합쇼핑몰에 가서, 아이와 밥을 먹고 구경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20분. 이제 갓 36개월을 넘긴 아이는 분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낮잠시간과 겹쳐 나에게 안아달라고 조를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타기로 결심했다. 물론 지하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 결심이 얼마나 무모한 결심이었는지 상상조차 못 했다.


일단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높지 않은 계단이라, 유모차를 들고 아이의 손을 잡고 내려갔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갔던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집과 완전히 반대 방향이라 완전히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지하철개찰구에 도착했지만 나는 또다시 지하철 선로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찾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지하철을 탈 때도 생각보다 넓은 지하철과 선로 간격에 놀라며, 아이를 내려 걸려서 지하철을 타야만 했다. 목적지 역에 도착해서 쇼핑몰로 갈 때도 앞선 고행은 반복되었다. 엘리베이터를 찾으려면 한참을 걷거나, 그도 아니면 엘리베이터가 아예 없는 곳도 있어서, 유모차를 들고 아이와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아이와 손을 잡고 유모차를 드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은 타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휠체어를 탄 사람들은 어떡하지? 사실 우리 아이는 걸을 수 있으니, 조금 힘들고 번거롭지만 유모차에서 내려걸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휠체어에서 내려서는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문득 얼마 전 출근길에서 마주한 장애인단체의 시위가 생각이 났다. 당시 시위로 지각을 했던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의 출퇴근 시간에 피해를 주면서 저렇게까지 시위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나의 불편은 그날 단 하루였다. 그들은 매일 같이 내가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에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를 찾느라 일반 사람들의 배를 넘는 시간을 지하철에서 헤맸을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는 내가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에 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듯, 휠체어를 놓고 올 수는 없으니 밖에 나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동의 불편함을 이유로 많은 장애인들이 외부 활동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제야 나는 그들의 구호와 외침이 진실로 와닿았다. 그들에게 이렇게 불편하게 설계된 대중교통은 단지 불편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깥 생활, 사회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은 불편하겠지만, 유모차가 없어도 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탈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조금만 지나면 집에서 지하철 정도는 너끈히 걸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가진 어린이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평생을 그렇게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부디 우리 아이가 유모차를 졸업하기 전에, 지하철을 타고 아주 편히 유모차로 놀러 가자고 마음 편히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참고로 나는 그날 밤 12kg가량의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린 덕에 어깨 통증으로 끙끙대서, 당분간은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탈 생각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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