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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아리 Jun 18. 2021

남산에서 나쁜 부모를 만났다

아이는 명백한 약자이다

마 전 결혼기념일이라 연차를 낸 남편과 오랜만에 남산으로 데이트를 다. 그리고 남산에서 한 가족을 만났다. 두 여자아이와 엄마 그리고 아빠. 얼핏 한 명은 7살 즈음, 한 명은 5살 즈음되어 보였다. 나는 타인에게 오래 시선을 두는 편이 아님에도, 이 가족에게는 계속해서 눈길이 갔다. 둘째로 보이는 아이가 우리 첫째와 나이가 비슷해 보여 반가운 마음 때문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귀엽고 눈길이 간다. 처음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갔어야 할 평일 오전 시간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남산에 온 부모가 참 정겨워 보였었다. 그런데 이내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남산을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내내 아빠는 두 아이에게 계속해서 짜증 섞인 어조로 명령했다. '조용히 해.' '가만히 있어.' '저리 가.' 기다리는 10분 내내 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익숙하다는 듯 그런 아이와 아빠를 쳐다만 보았다. 이상한 것은 아이들은 바로 근처에 있는 내가 듣기에도 전혀 시끄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말하고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불현듯 이것이 아동학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동학대가 반드시 아이를 때리거나 욕을 하는 등의 현격한 가학 행위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정서적 불안과 위협을 느끼게 하면 그것 또한 학대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남산까지 왔음에도" 굉장히 위축되어 보였고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5살, 7살 무렵의 아이가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의자에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 그럼에도 아이는 계속해서 혼나고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10분이 지나고 그 가족과 함께 케이블카를 탔다. 이내 엄마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은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댔다. 이때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아빠의 가만히 있으라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저 부모분명 평일 오전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남산까지 놀러 온 본인들을, '좋은 엄마' '좋은 아빠'로 착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본인들의 행동에 전혀 문제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사실 저런 부모는 흔하다. 이유 없이 아이에게 짜증 섞인 어조로 명령하듯 말하는 부모들은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정서적 학대를 일삼을까. 단순 명료한 이유는 아이가 명백한 약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가 부당하게 짜증을 내고 협박과 명령을 일삼아도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 남산의 그 아빠는 과연 본인의 직장 상사에게도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부모는 아이가 약자임을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부분 통제하고 억압하고 명령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가 더 심해지면 잔혹한 신체적 학대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하나의 존중받는 인격체로 대하는 것, 그것이 좋은 부모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아이들에게 명령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부탁하거나 설득하려 노력한다. 또한 혼을 낼지언정 짜증은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물론 가끔은 나도 이성의 끈을 놓을 때가 있지만) 물론 정말 어렵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나쁜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좋은 부모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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