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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우기엔 옛날이 더 좋았다.-아동학대에 대한 고찰

by 둥아리


나는 3살 4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옛말이 절절하게 다가올 만큼 아이들이 예쁘고 소중하다. 그런데 요즘 하루 걸러 하루로 아동학대 소식이 들려온다. 친부모가, 계모, 계부가, 아이를 때리고 방임한다. 분명 계모도 계부도 아이를 기른 정이 있을 터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분노하고 슬퍼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요즘 들어 잔혹한 아동학대가 증가하는가.


물론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 예전에는 훈육으로 허용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학대가 된 부분도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또한 예전에는 그러한 일이 있더라도 지금처럼 sns나 인터넷이 활발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아동학대 실태는 꽤나 심각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최근 몇 년 사이에만 해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아동학대 사건이 여러 개 있었다. 만 3살도 안된 아이가 집에서 홀로 굶어 죽었다. 16개월의 아이는 생의 반이 넘는 시간을 내내 학대만 당하다 결국에는 췌장이 파열되어 죽었다. 학대를 가한 부모에 대한 분노를 넘어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조그만 아이가 굶어 죽도록 아무도 몰랐단 말인가? 16개월의 아이가 8개월간 맞아 죽도록 주변은 아무도 몰랐단 말인가?


불과 20년 전, 그러니 나의 유년기만 해도 나는 동네의 어른들과 모두 알고 지냈다. 내가 어떻게 자라는지, 나의 부모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서로 알고 있었다. 이웃들은 아이가 커가는 것을 함께했다. 당시 동네 이웃의 집에 가서 밥 한번 안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 가끔은 바쁜 엄마 아빠 대신 놀아주기도 했다. '한 아이가 자라는 데에는 온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바로 옆집과도 대화를 하는 것도 어색하다. 옆집에 애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있어도 몇 살인지, 학교는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아이가 학대를 당해도 알기 쉽지 않다. 물론 모든 학대의 문제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1차적으로 있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 모든 부모가 좋은 부모일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짐승만도 못한 부모도 존재한다.


그러니 부모의 도덕성이나 책임감에만 한 아이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모든 아이들이 최고의 양육자를 만나는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학대라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적어도 '최악의 비극'을 막아주는 것은 이웃의 관심이다. 나아가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다. 옛날처럼 아이의 성장을 함께 하는 시절이었다면, 적어도 아이가 굶어 죽도록, 맞아 죽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참 아쉽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주변의 보는 눈이 엄마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행동을 단속하게 한다. 실제 나 또한 집에 손님이 있거나 밖에 이웃이 있을 때, 언행을 좀 더 조심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아동학대로 죽어간 아이들과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아이들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옛날과 같은 이웃의 관심이다. 주변 아이들에 대한 옛날과 같은 애정 어린 시선이 학대받는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


부끄러운 애도

연민이 봄볕 같아도
분노가 불볕 같아도
네가 묻힌 땅은 얼음장이다.

세상에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또래의 입김에 섞이어
눈 덮인 놀이터를 선회했을 테지만
무슨 수를 써도 너는 돌아올 수 없다.
안일한 자들이 멍든 손을 놓친 이후로
더 이상 재잘거리지 않을 만큼
너에게 침묵은 쉬운 일이 되었지만

작은 점처럼 외로이 웅크린 마지막을 생각하면
이제 와 눈이 붓도록 울어준들
이름만이 서러워질 뿐이다.
너의 죽음은 너무 이르고
나쁜 습관처럼 우리는 면목이 없다.

- 댓글 시인 제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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