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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의 초록 밤송이

by 돌강아지

오늘은 밥으로 옥수수, 감자, 고구마를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는 철이 지나고

이제는 밤고구마가 나온다.

요즘은 밤고구마 철이다.

밤고구마는 오래 찌는 게 아니라고 한다.

오래 찌면 팍팍한 식감이 사라진다.

밤고구마를 먹으면 가을 운동회가 생각난다.

운동회 때 간혹 애들이 밤고구마를 싸왔었다.

그러고 보면 기억은 참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


친구에게 오늘 옥수수 감자 고구마만 먹었다고 하니까 구황작물만 먹었네라고 했다.


아침에 남의 집 고구마 밭을 지나는데

풀벌레가 크게 울었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풀벌레가 운다.

도대체 어떤 얼굴이 그렇게 예쁘게 우는지.

사는 곳 모두 다양한데, 많고 많은 곳 중 풀에 사는 게

참 소박하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집이 풀이라니.


아득히 먼 별이 반짝일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더듬이 안테나를 움직이며 주파수를 맞추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라디오 같기도 하다.


라디오를 들어보니 가을이 온다고 한다.



요즘 길에 연두색 밤송이가 떨어져 있다.

아직 크기가 작은 어린 밤송이.

저 정도 크기면 밤 하나 정도 들어가려나.

왜 더 크지 않고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언니는 길에 떨어진 밤송이들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숯검댕이들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다.

갑자기 발아래로 몰려올 것 같다.

초록색 숯.

귀엽다.


요즘 분꽃 씨앗이 많이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씨앗을 줍기도 하고

줄기 끝에 맺은 씨앗을 톡 떼어내기도 한다.


분꽃 씨앗을 모으는 건 유독 재밌다.

닭이 달걀을 낳은 것처럼 신기하다.

다른 씨앗이랑 다르게 크기도 커서 줍는 재미도 있다.

분꽃 씨앗은 예쁜 포장지 안에 든 초콜릿처럼

잘 포장되어 있다.

그래서 씨앗을 톡 하고 떼어낼

초콜릿을 집어 올리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난 우리 집 분꽃 씨앗만 동그랗고 통통하고

예쁜 줄 알았는데 햇볕에 오래 두면

크기가 줄어서 길쭉하고 작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분꽃은 해가 약한 시간에 핀다.

아침저녁으로.

맡아보면 향기도 난다.

달맞이꽃 비슷한.


분꽃은 꽃말도 마음에 든다.

겁쟁이, 내성적, 소심, 수줍음.

나 같아서 분꽃이 더 좋아졌다.

너 소심해서 아침저녁으로만 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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