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명절에 든 단상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과 친구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다녀왔다. 나의 친구들은 새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고 아는 언니는 임신을 해서 새 가족이 생겼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이 새 가족을 만들고, 가족이라는 것이 생기고 없어지는 생태를 목도하며, 과연 부모형제를 제외한 새 가족을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나에게, 추석 명절에 할머니댁을 방문하며, 고민이 한 가지 생겼다.
‘나의 노년기에 과연 누군가 나를 찾아와줄까’
내가 나의 할머니들께 연락을 드리고 찾아뵙는 것은 할머니들의 안위가 궁금해서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응당 그래야 하기 때문이었다. ‘착한 손녀'가 되고 싶고, ‘외로운 할머니'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할머니들과 밀접한 친밀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손자’들을 더 예뻐하고 또렷이 기억하는 할머니에게 굳이 손녀의 존재를 좁은 기억의 영역에 욱여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고, 마음이 갈 때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내가 지키는 예의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차 ‘관습'에 물음표를 던지면서, 이후에는 차례뿐만 아니라 설과 추석에 방문하는 것 자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동안 관습이 간소화되고 실용적인 측면으로 변모하는 것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지만 문득 겁이나기 시작했다.
내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관습이란 희미해졌을 시기에, 내가 유익한 사람이 아님에도 과연 그들이 나를 찾아와 줄까 하는 두려움.
그러기에 나는 지금부터라도 누군가에게 재밌거나 유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라도 노력을 해야하나 하는 물음과
만약 어떠한 형태의 가족도 꾸리지 않게 된다면, 더욱이 그러하도록 부던히 노력해야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잠시 메웠다.
몇 년 전, 친구 A는 ‘우리 세대가 1인 가정이 많을테니, 늙어서도 1인 가정을 위한 복지나 시설,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서 걱정이 없다'고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도 ‘관습'만큼이나 공허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오늘 이후의 세계를 상상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것들이 변화하고 새로 생겨날지. 관습은 때묻어 지워지고 잊혀지고 지켜질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관습들이 생겨나겠지 하는 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