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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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봤다. 지극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사랑과 배움은 닮아있다는 것을.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오만이다>라는 것을.
엘라이자가 ‘그’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엘라이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자신이 아는 존재라고 속단하지 않았으며, 두렵다고 피하지도 않았다. 엘라이자는 타자를 향한 맑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갖고 ‘그’에게 구애했다. 그의 모습은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들의 태도를 닮아있었다.
사람들은 미지의 것을 맞닥뜨리면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낯선 세계를 두드릴 때 우리는 배운다. 배움은 관심의 지속, 속단하지 않는 신중함, 외부에 대한 개방성을 요구한다. 배움은 실패의 가능성도 지닌다. 결국, 배움은 자신을 내려놓고 바깥 세계를 수용할 준비가 된 이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모름’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알고 싶다’와 ‘알고 싶지 않다’. ‘알고 싶다’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모르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 사랑 역시 배움처럼 ‘모른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타자에 대해 ‘안다’고 결론짓는 순간 사랑의 가능성은 말소된다.
연인-타자는 영원히 낯선 존재다. 쉼 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는 매 순간 상대의 낯선 모습을 마주한다. 타인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종종 당혹감도 느낀다. 타자는 우리에게 경악과 경탄을 한데 안긴다.
소련의 스파이인 디미트리 박사와 상관의 대화를 주목하자. 드미트리는 소련에서 일하는 이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상관은 말한다. “우리는 배우는 것에 관심 없다. 미국인들이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드미트리의 배움이 탐구에 대한 열망에 가깝다면, 상관의 배움은 세계를 정복하는 무기다.
전자가 엘라이자의 시선이라면, 후자는 스트릭랜드다. 엘라이자는 ‘그’를 호기심을 갖고 지켜본다. 사랑은 ‘알 수 없으나 알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호기심이 유지되는 한, 사랑은 지속된다. 엘라이자는 ‘그’에게 계란을 건네며 다가가고, 음악을 들려주며 반응을 살핀다. 춤을 추며 감정을 발산하다가도,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한다.
스트릭랜드는 사랑이 불가한 인물이다. 사랑도 배움처럼 자신의 욕망과 세계가 굳건한 사람에게는 곁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번뜩이는 눈빛은 먹잇감을 물색하는 맹수를 닮았다. ‘그’는 스트릭랜드에게 제압할 대상일 뿐이다. 그가 엘라이자에게 매혹되는 이유도 같다. 상대를 짓누르고, 자신을 분출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엘라이자가 사랑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엘라이자가 ‘그’를 배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의 눈에 비친 그가 알 가치도 없는, 알고 싶지도 않은 대상이었다면, 엘라이자에게 ‘그’는 그 자체로 탁월한 타자이자, 배움이자 사랑의 대상이었다.
사랑과 배움은 두려움과 설렘, 곧 명과 암을 내재한 ‘떨림’을 유발한다. ‘그’를 구하겠다는 엘라이자에게 자일스는 말한다. 두려워하지도 않는구나, 라고. 엘라이자는 말한다. “두려워요. 아주 많이.” 그렇게 그는 두려움과 설렘을 품고 ‘그’를 사랑했다.
기예르모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