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머저리의 노란 드레스를 벗으며
- 사랑을 하는 나는 너무나 한심하다. 저 자신도 못하는 것을 상대에게 억지로 요구할 만큼 오만하다가 상대가 턱 없이 잘못할 때는 자신이 문제인가 질문한다. 사리분별이 흐려진다.
- 미국의 영적 교사이자 ‘새 메시지’ 협회의 설립자인 마샬 비안 썸머즈의 강의를 본다. 천사를 만났다는 일화에서 사이비를 의심하지만, 중요치 않다. 그는 ‘자신의 인생길을 알기 전 성급하게 관계에 빠지는 일’을 경고했다. 내 얘기잖아.
- 강수연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소라와 김현철이 부른 동명의 노래의 원작이 궁금해서 영화 <그대 안의 블루>를 봤다. 사랑은 아니지만 우리의 만남 어둠은 멀어지네. 가사의 정체를 드디어 알았다. 각자 같은 분야에서 재능을 공유하는 동료이면서 인간적 가치관은 살얼음판을 걷는 라이벌인 남과 여. 남자는 여자에게 재능 그루밍을, 여자는 남자에게 <미녀와 야수>의 구원서사를 씌운다.
비대한 자아를 깎아내는 건 에로스라는 대류 현상이지만, 큐피드의 화살은 금세 삭는다. 오래 버티는 건 어둠에 맞수를 두는 프시케의 촛불. 불꽃이 힘을 낼수록 촛농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사랑은 아니지만 어둠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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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내 오랜 테마였다. 뻔한 질문을 덧붙인다. 우정도 사랑일까? 기존의 성애적 긴장감이 비운 자리에 그 혹은 그녀가 들어선다. 몸이 기우는 대신 언제라도 저 사람에 의해 내 의견을 유보하거나 재검토할 수 있음. 혹은 그쪽으로 아예 건너가기. 혀의 직접적 만남으로 타액을 공유하는 대신 목울대에서 출발해 치아와 입술 사이로 자모음이 철썩이며 서로를 넘나든다. 대부분 ‘여자친구(들)’이었다. 이 관계도 사랑에 넣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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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집이 말도 안 되게 어수선하다. 물건을 다 끼고 사나? (정작 내 방은 책 더미로 만만치 않다. 읽다 만 책과 펼치지도 않은 책, 다이어리, 노트. 심지어 보는 페이지는 다 펼쳐놓아야 한다)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데도 끙끙거린다. 나더러 독선적이라면서 점심 메뉴까지 고르랜다. 또 지휘권을 휘둘러야 한다. 돌아오는 택시 안. 갑자기 말이 없다. 뭐 때문에 상했지. 그의 눈치는 자꾸만 짐작을 발동시킨다. 순식간에 공기가 변한다.
그의 어지러운 방, 결정을 미루는 우유부단함, 넘치는 식탐을 내 잣대로 재단한다. 사람을 쥐구멍으로 모는 묵언의 제스처에는 한없이 물러진다. 나는 타인의 기색에 무디고, 공감력이 떨어지니까. 그의 나르시시즘적 횡포에 나도 가담한다.
잣대가 불필요할 때는 절대자인 양 키를 잰다. 다정함을 가장한 가스라이팅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사리분별이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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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인류의 가장 위험한 발명품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만난 마샬 비안 썸머즈 영상에서 그랬고, 몇 주 전 읽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에서도 그랬다. 주변 모든 것이 로맨스의 위험을 알린다. 자주 생물학적 명령에 입각해 남자에게 끌렸다. 친구들이 말하는 배려심이나 선량함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한편 서비스직 종사자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감점이니까. 감점과 가점은 다르다. 감점이 되면 만날 수 없으나, 가점이 있다고 만나진 않는다.
로맨스가 무슨 죄냐고? 로맨스의 본질은 ‘속수무책’이다. 그리고 불가항력적 재난에 개체를 밀어 넣는 건 DNA가 아니고선 말이 안 된다.
나는 수산물 시장에서 좋은 생선을 자신 있게 고르고, 주눅 들지 않고 흥정하는 남자를 높게 친다. 지금도 아니라곤 못하겠다. 이건 하나의 명제 같은 사례일 뿐이다.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부장제가 쌓아올린 남성성에 압박을 보태는, 그러나 낮에는 페미니즘 책을 읽는 <문명화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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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 사고를 하지만, 양가적 틀에 갇히지 않는다. 해와 달을 양과 음으로 부르지만, 둘이 주고받는 영향력을 이해한다. 바다가 보여주는 수많은 빛깔을 터쿠아즈, 에메랄드, 프러시안 블루, 인디고 블루 등으로 일컬을지언정 바다의 색은 고정된 언어에 담기지 않음을 안다. 오랜 휴식기를 가진 뒤 다시 페미니즘 책을 읽는다. 여전히 수산물 시장에서 나보다 능동적으로 회를 떠 줄 남자를 바란다. 여전히 나보다 어떤 점이 뛰어나길 ‘그’에게 바라지만, 이제는 그도 수줍고 취약할 수 있음을, 그때엔 내가 나설 때라는 것을 안다.
여성성이 상처를 품는 둥그스름한 연고라면, 남성성은 기꺼이 상처를 무릅쓰는 각진 용기. 날 것의 말하기와 매서운 정신을 구사하는 내게 ‘치열하게 생각하는 너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고 말한 친구처럼, 한 발 물러서는 신중함과 바람이 드나드는 말하기를 하는 그에게 ‘숨을 고르게 해 줘서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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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수포로 돌아간 로맨스를 축하한다. 규격화된 관념 안에 그를 얼마나 욱여넣었는지. 그의 남성성을 클로즈업하고, 그렇지 못한 점은 크롭해 화면 밖으로 내버렸는지. 혹은 화면 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로 늘리거나 축소했는지. 그는 서랍 속에 갇힌 기분을 느꼈을까. 이제 나는 로맨스의 피상적 감미로움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해변에 맞부딪칠 때마다 파도가 수놓는 레이스. 유순한 포말은 거대한 대양의 극히 일부. 그(들)와 내가 벌였던 아름다운 난장판은 가드가 설치된 유수풀에서 숨대롱을 입에 문 채 예쁜 것들을 눈요기하던 미미한 물장구. 서로의 협곡에는 근처도 가지 못한 채 뒤돌았던 시절을 애도한다. 이제 와 심연의 빛깔을 응시하는 됨됨이를 갖췄음을 미심쩍게 긍정하기.
쉽사리 비난하거나 무신경한 ‘그럴 수 있지’ 말고, 공기가 통하는 외이도로 끝까지 듣기. 우리는 다 그 같은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고 숨을 더해 내뱉는 사람. 그러고서도 고치 마냥 이불 안에 웅크리는 대신 ‘그래도 나가볼까’하고 몸을 일으켜 찬공기를 맡으러 가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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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탁월함을 알아보고 알아주는 것
서로가 못남을 알아채고 직면하게 하는 것
<라라랜드> 속 엠마의 노란색에 얼굴을 묻는 대신
파란색의 비애를 옷장 안에 지켜두는 것
빛의 동선마다 색을 달리하는 상대의 모습에 말을 포개거나 몸을 빼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하게 도발하고, 그의 연약함이 타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격정과 평온을 다 가져다줄 너라는 존재는 그와 나의 깊은 간격에서 가능해질 거라는 것을.
빛을 드리우고 거두는 것이
사랑의 손길이 아니기를
언젠가 나에게 도화지 같다고 했던 그
그의 말대로 나는 물처럼 수용적이었고
그 모든 빛깔을 수렴한 나는
이제 가장 검은색에서 출발하려 해
짙푸른 검정에서
*영감을 받은 것
마샬 비안 썸머즈의 ‘내 안의 빛’ 채널의 ‘관계보다 삶의 방향이 먼저’ https://youtu.be/lo_QM2ZD06I
감독 이현승, 영화 <그대 안의 블루>
아야진 해변 (사진 | 궁금한 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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