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궁금한 민지 Aug 05. 2019

핑크 카네이션 - 장난감 펜과 사진을 위한 소품 너머

페터 팝스트: WHITE RED PINK GREEN 展

지난주 토요일, 회현역에 있는 피크닉에 갔다. 도착 시각은 3시 30분. 전시를 보려면 1시간을 대기해야 했다. 같은 건물의 카페로 눈을 돌렸다. 연회장에 있을 법한 기다란 테이블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테트리스처럼 채우고 있었다. 등이 땀으로 흥건했다. 아쉬운 대로 더위를 식히고자 아트샵에 들어갔다. 합성 소재로 만든 듯한 카네이션이 시야에 들어왔다. 맥락이 제거된 조화는 문구점에서 파는 장난감 펜을 떠오르게 했다.

1시간을 기다려 전시실에 입장했다. 첫 번째 공간인 WHITE는 자작나무 숲을 연상시켰다. 바닥은 눈을 닮은 물질로 가득 차 있었다.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했다. 발목까지 오는 컨버스를 발을 내려다보았다. 귀찮은 일을 맞닥뜨렸을 때의 어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신을 벗고 발을 내딛자마자 ‘눈밭’이 주는 감각에 매혹됐다. 소금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발 위로 소금이 쏟아졌다. 생각은 물성이 주는 감흥으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이어지는 RED와 PINK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PINK가 그랬다. 바닥에는 연분홍과 진분홍 카네이션이 거의 균일한 간격으로 솟아 있었다.  꽃이 비교적 드문드문 심어진 쪽은 자연스레 ‘통로’가 됐다. 1982년에 선보였던 무대 <카네이션>을 재현한 공간이었다. 당시 피나는 페터가 자신이 애써 심은 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망가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자 “우리가 카네이션을 살리면 되죠”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공간을 가득 채운 건 카네이션을 향한 관심이 아닌, 들리지 않는 셔터 소리였다. 정방형 화면에 인물을 중심으로 배치된 꽃들은 고유의 물성을 잃어버린 채 납작해졌다. ‘각자 방식으로 공간을 느끼라’는 기획자의 주문에 카메라가 얼마나 큰 방해물인지 생각했다. 꽃잎을 직접 만지는 감각과 꽃을 배경으로 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카네이션은 사진을 위한 소품으로 전락했다.

PINK는 직접 감각하지 않고는 예쁜 세트장에 불과해 보였다. 만약 꽃이 더 빼곡히 심어졌으며 이를 망가뜨리지 않고 지나가야 한다면? 물을 주면 축 처진 꽃이 되살아난다거나, 꺾인 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야 한다면? 사진을 찍으려는 다른 이를 위해 자리를 피하거나, 사진에 찍히지 않으려고 급급한 대신 더 다양한 광경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차라리 의도적으로 촬영을 금지했다면 어땠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옥상에 위치한 마지막 공간 GREEN으로 향하는 길. 계단을 오를수록 젖은 흙과 풀향기가 밀려왔다.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후각은 적극성을 발휘하지 않아도 몸속으로 은은하게 침투했다. 곳곳에 널린 흰 천에는 피나 바우쉬와 페터 팝스트의 작업 방식과 관계를 짐작케 하는 문구들이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진을 찍었지만, 렌즈에 채 담기지 않는 초록색 향이 사람들의 주변을 감쌌다.
 
시선을 던지고, 구도를 확인하고, 재빠르게 또 다른 시선인 카메라를 개입시키는 행위를 방해할 순 없을까. 시각이라는 감각 기관의 한계와 관람객이 전시를 소화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2층에는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기록할만한 순간들이 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무대를 활보하는 무용수들이 그려졌다. 그들이 실제 무대를 만드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오로지 맨눈으로, 맨몸을 통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