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와 거울과 물의 공통점
도화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H는 내게 도화지 같아서 좋다고 말했다. 하얀 도화지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빨강, 노랑, 파랑 크레용이 길게 색깔을 드리우며 종이 위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얼굴에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디선가 본 일본 영화 속 엎드린 여자의 등에 먹물로 붓칠을 하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찰진 사투리로 30대 이상의 연애에 뼈 때리는 조언을 해주는 유튜버 채널에서 ‘나랑 맞는 남자는 누구일까?’라는 영상을 봤다. 자신과 맞는 상대를 알려면 자기부터 알라는 요지로 귀결됐다. 맞는 말이었다. 구독자만 해도 저마다 다를 텐데, 어울리는 상대도 각양각색이겠지.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해가 갈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홍대에서 열린 기네스 팝업 스토어에 갔다. 1층은 기네스를 생맥주로 제공했고, 2층엔 쿠퍼 독을 활용한 칵테일을 만들어줬다. 온더락으로도, 토닉을 섞어 하이볼로도 마실 수 있었다. A 선배는 하이볼을 타는 방식이 우리나라와 일본이 달라서, 일본에서 하이볼을 마시면 밍밍하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아는 게 많고, 좋아하는 게 명확하구나. 많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술과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두 선배의 이야기를 홀리듯이 들었던 잔상만 남아있다.
우리술은 감홍로가 좋고요,
칵테일은 보치볼이 좋아요
숙성주인 와인과 막걸리보다는 맥주나 소주가 좋다. 뒤끝 없이 깔끔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참이슬 클래식. 전통주도 맛들이면서 아끼는 술이 생겼다. 기생 홍랑의 빼어난 미모와 연정을 연상시키는 감홍로라는 조선3대 명주인데, 무거우면서도 우아한 달큰함이 일품이다. 향수로 치면 묵직한 머스크향 덕에 겨울에 뿌리기 좋은 샤넬 N.5를 닮았다. 칵테일이라면 보치볼을 꼽고 싶다. 아몬드향 리큐어 아마레또에 오렌지 주스를 탄 칵테일이다. 황도의 풍성한 복숭아 맛에 고급스러움을 3배 곱한 맛이다. 시냅스에 그린라이트가 팽-켜졌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많다. 커피는 라떼가 좋다. 김치는 갓 담근 겉절이가 좋고. 가요도 많이 듣지만, 클래식 피아노를 감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푹 빠진 곡으로는 쇼팽 마주르카 41번 c샵 마이너 작품번호 63-3번이 있다. 3/4박자지만, 강세가 뒤에 있어 끄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다단조가 풍기는 비애감이 매력적이다. 폴란드라는 분모 덕분인지 영화 <콜드 워>가 떠오르는데, 영화가 좋았던 사람이라면 자신 있게 추천한다. 발레를 할 때 더는 불가능할 때까지 코어 힘을 쥐어짜는 감각도 좋다. 수업 끝무렵에는 긴장이 탁 풀리면서 땀샘처럼 눈물샘이 자극되는데, 그 기분을 좋아한다.
칵테일, 수학, 그리고 히스토리
스스로 색깔 없는 인간처럼 느낀 것은 작년부터였다. B의 전공 때문에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도 인상적인 순간은 그가 “수학을 한 번 배워볼래?”라고 물었던 때다. 미대 입시를 선택하고 18살 이후로 수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던 내게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하자 그는 기초가 없어도 접할 수 있는 대수 같은 과목이 있다고 덧붙였다. 낯선 대상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yes24에서 우연히 봤던 책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읽겠다고 소소한 의지를 표명했다. 끝내 읽지 못하게 됐지만.
몇 주 전 H와 소련군의 전설적인 여성 저격수라는 루드밀라 파블리첸코의 일대기를 다룬 극 영화를 봤다. 가벼운 수다를 떨다가 우연히 켠 TV에 둘 다 몰입했다. 역사극이었으니까. 대화의 물꼬를 트는 쪽은 대개 H다. 우리의 대화 7할은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유럽과 동아시아사부터 현 정부에 대한 비판과 향후 10년의 경제 비전이다. 엊그제 나는 술집에 앉자마자 다음처럼 말했다.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뉴스 좀 몰아보려고 했는데, 소설을 읽느라 못했어.”
1997년 IMF 사태의 각기 다른 경제 주체들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바라보는 시각이 인상적인 드라마 <체르노빌>. 앞으로 내가 봐야 할 작품 목록이다. 함께 발장구를 칠 수 있을 정도의 관심사 공유는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행히 고등학생 때 근현대사를 좋아해 1894년 갑오개혁부터 1945년 광복까지 A4 7장을 연결해 연혁표를 만든 전력이 있다. 하지만 타인의 관심을 따라가는 여정은 자주 힘에 부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지라 하소연할 데도 없다.
타인의 반영 같은 자신
내 취향을 내세우기 보다 상대의 관심사를 들여다 본다. 칵테일을 공부하고, 수학 서적을 뒤적이고, 역사 다큐멘터리를 찾는다. 자기가 좋아서 해놓고는 내 뜰에서 너무 멀리왔다고 생각한다. 기력이 부칠 때면, 지금 뭘하는 건지 싶은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주는 사람은 없나, 하는 생각도 든다.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게 좋다>라는 말이 이젠 왜 나오는지 안다. 그게 이상적이라기보다는, 심신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애인에게 손열음이 나오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공연을 보자며 팸플릿을 내밀 자신도 없다. 내 입맛을 타인에게 들이댄 경험이 적은 탓이다. 어색하고 상대가 싫어할 것만 같다. ‘네가 좋아하는 걸 어필하면 나도 고려해볼게’라고 한 B가 스친다. 누가 좋아지면 그 사람의 관심사를 자연스레 따라가는 성향인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아빠 다리를 한 채로 ‘뭘 들고 왔는지 내 함 보세’라며 검토하는 태도랄까. 서운했고, 마음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됐다.
연애 예능 프로그램 <하트 시그널 3>에는 내 고민이 묘하게 오버랩 되는 장면들이 나왔다. 지현이 강열과의 데이트에서 “난 물 같은 사람이라”라고 말하는 장면과 가흔과 식사하던 중 인우가 자신을 “거울 같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우울한 사람과 있으면 자신도 우울해진다던 인우는 가흔과 함께여서 몸태도 밝아진 것 같다고 말한다. 타인에 영향을 심하게 받는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개성의 채도가 낮다는 고민이 자신에 대한 회의로 돌아오던 터라 공감됐다.
정말 나는 도화지 같고, 거울 같고, 물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그럼 나는 상대의 반영이기에 누구와도 무던히 다 어울리는 사람인 걸까? 사람마다 제짝이 있다는데, 대체 난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과 어울릴까. 비오는 날 아스팔트가 패인 곳에 고인 물을 바라봤다. 물은 정량만큼 고여있지만 쉼없이 변화하는 주변 사물을 제 안에 담아내느라 부산스러웠다. 물 같은 사람이야, 라는 말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방송을 보다가 이런 데서 공감하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