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반하지 않더라도, 이유가 있다면
명품 백을 두고 A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아버지 선물로 페라가모 키링이 어떠냐고 운을 띄운 이야기는 버버리 매장에서 본 캔버스 백에 대한 찬사를 거쳐 400만 원에 육박하는 디올의 새들 백에서 멈췄다. 남들은 난리인데, 여전히 예쁜 줄 모르겠는 가방을 공유했다. A는 샤넬 백을 언급했다. 나 역시 몇 년 전까지 퀼팅을 그저 패딩 점퍼에 추위를 막는 불가피한 요소쯤으로 여긴 지라 이견이 없었다. 다만 ‘예뻐 보이는’ 효과는 존재했다. 샤넬이 어떤 생각으로 가방을 디자인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두 팔을 자유롭게 한 최초의 핸드백이며, 샤넬 본인의 사생활에 기반한 다양한 수납공간, 소지품을 찾기 용이한 붉은 안감까지.
논리를 갖춘 디자인은 곧 아름다움이 된다. 비주얼로 한눈에 혹하게 하지 못할지라도,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근거는 제품을 다시 보게 한다. 실용성과 직결되는 기능은 제품을 포괄하는 미학으로 이어지며, 나아가 제품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수단이 된다.
브랜드는 프로모션에 기대지 않는다
업무 때문에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구사하는 언어를 조사해야 했다. 구찌 홈페이지를 들여다봤다. 상단에는 재키 백에 대한 예고와 2020 프리폴 컬렉션, 그리고 GG 엠보스 백이 띄워져 있다. 스크롤을 내리자 GG 엠보스 백의 누끼 컷이 넓은 영역을 단출하게 채웠다. 이어지는 화보컷. 자세한 내용은 ‘더 보기’로 제시된다. 볼드 처리나 눈에 띄는 서체가 사용되지 않은 것이 특징. 다음으로 홀스빗 모티프를 활용한 슬리퍼가 등장하고, 이를 유기농으로 생산된 소재나 재활용 소재로 만든 컬렉션이 뒤따른다. 하단에는 브랜드의 현 관심사를 드러내는 캠페인이 놓여있다. 환경에 대한 입장과 젠더 폭력 반대 등 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을 표출하고 있다.
반면 평소 들르는 쇼핑몰은 어떠한가. 입구는 각종 프로모션으로 점철돼 있다. 사람들의 반응을 대변하는 ‘Weekly best’가 눈길을 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착용 컷은 시선에 호소한다. 개별 상품은 빼곡하지만, 이들을 묶어주는 방향은 모호한 분위기로만 떠돈다.
꿈과 신념을 구매합니다
리더십 전문가 사이먼 사이넥(Simon Sinek)의 TED 강연을 봤다. 그는 대중은 ‘무엇(what)’을 사지 않고 ‘이유(why)’를 산다고 말했다. 전자기기에 빗대어 말했다. 똑똑하고 잘 디자인된 일 잘하는 컴퓨터가 있습니다. 정말 스마트합니다, 라고. 기기를 사고 싶은지 청중에게 물었다. 다시 그는 애플의 화법을 도입했다. 우리는 도전합니다. 도전하는 것은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폰을 만듭니다. 그는, 사람들은 기업이 만든 물건이 아니라 그들이 주창하는 <신념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상의 편의를 도울 전자기기가 아닌, 시대를 선도하는 감각과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둔갑시켜 줄 환상을 구매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마음속에 잠재한 꿈과 신념을 대변해 주는 대상에 지갑을 연다.
이는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자기소개서가 어려웠던 이유와 상통했다. 종종 길을 잃었고, 때로 억지로 스토리를 엮는 듯한 느낌에 자괴감이 들었다. 유난히 힘들었던 어느 날, 자기소개서가 어려운 까닭을 B에게 물었다. "철학이 없어서가 아닐까." 후두려 맞는 말이었다.
점원의 목소리 톤도 브랜딩이다
최근 피식대학의 유튜브에는 프랜차이즈 매장 직원들을 따라 하는 성대모사 영상이 올라왔다. 스타벅스 직원이 구사하는 바리톤 창법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마침 며칠 전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마주한 직원이 떠올랐다. 콘트라베이스를 닮은 저음에 특유의 억양을 곁들여 "114번 고객님. 주문하신 소이라떼 톨 사이즈 나왔습니다"라는 멘트를. 목소리의 재질이 20년은 된 말레이시아산 옐로우-오커 빛깔의 나무 같았다.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하면서도 주변을 편안하게 감싸는 질감. 스타벅스는 직원들의 음성 텍스처까지 브랜드를 구현하는 디자인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
뚜렷한 철학은 제품과 서비스 면면을 설계하는 토대가 되고, 그렇게 구성된 요소들은 자연스레 스토리가 된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구매한다. 우리는 그것을 브랜드라고 부른다.
가격을 문제 삼지 않는 브랜드의 역설
세상에는 독특한 역설이 있다. 구찌의 디오니소스 백이 있다고 치자. 누구도 가방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이끌어낸 디자인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브랜드명만 겨우 들어본 사람이어도 왜 그 같은 가방에 200만 원을 지불하는지 반문하지 않는다. 가격을 뒷받침하는 '이유'가 있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이유를 따지지 않고 구매하는 제품에는 풍요로운 역사가 가득하다.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브랜드 히스토리는 그 자체로 소비자의 구매를 자극하는 지불 기제로 작동한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라는 말한다. 허실 뿐인 인기더라도 주목한다는 뜻이다. 시류에 잘 맞춘 아이템만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다. 하지만 브랜드는 결코 개별 아이템의 군집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몇십 년간 수많은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지속되는 하우스부터 신생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이들이 만든 제품에는 탄탄한 백그라운드가 있다. 100주년을 앞둔 구찌에겐 디자이너에게 영감의 창고가 된 장대한 아카이브가 있을 테고, 신생 디자이너라도 몇 년 간 쌓아온 취향과 영감이 피스마다 흔적처럼 묻어날 것이다.
컬렉션은 괜히 컬렉션이 아니다. 스무 착장 남짓한 옷 너머에 자리한 다채로운 아이디어를 그려본다. 언젠가 창업을 한다면, 사업 아이템인 ‘무엇’에 앞서 ‘왜’ 하고 싶은지 숙고한 뒤 시작하고 싶다. 지속 가능한 브랜딩이란, 바로 그 이유를 얼마나 심도 있게 축적하느냐(collect)에서 좌우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