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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Aug 30. 2020

코로나는 생활신조도 바꾸라고 말한다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는 방식

25살에 처음 먹어본 크레이프 케이크. 포크를 시트에 수직으로 내리꽂는 찰나, 당시 선임은 “크레이프는 이렇게 돌돌 말아먹어야 해”라며 글레이즈드 처리돼 있는 맨 위층 시트를 포크로 살짝 들추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말아 올렸다. 포크를 저렇게 쓸 일이 있구나, 하며 어설프게 따라 했던 기억이 난다. 그저 낯설었다.

이제 나는 크레이프를 그처럼 말아먹지 않는다. 지층처럼 층층이 쌓인 단면을 느끼려면 세로로 먹는 것이 제격이다. 시트를 하나씩 걷어내면, 롤처럼 다시 층이 형성되지만, 시트 사이를 균일하게 채우던 크림은 뭉개지고 만다. 내 기준 ‘크레이프 케이크를 제대로 맛보는 법’은 수직으로 썰어먹기다.

크레이프를 먹는 방법을 얘기한  시간을 보내는 방식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루를 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테다. 내 경우엔 공간이동이었다. 할 일이 있다면 일단 나갔다. 집에 머물 때도 가구의 본질에 충실했다. 소파는 쉬는 곳, 식탁은 밥 먹는 곳, 침대는 자는 곳. SNS에서는 ‘ 발자국도 나갈 필요 없는 신박한 침대따위가 인기인데,  기준에서는 말도  되는 가구였다. 욕구를 채울 수 있을진 몰라도, 능동태의 무언가를 해내긴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알쓸신잡>에서 작가 김영하는 카페를 커피 파는 곳이 아니라 ‘초단기 부동산 임대업’이라고 소개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에게 똑 들어맞는 정의였다. 그렇게 글을 쓰려고, 취업 준비를 하려고, 가방을 들쳐 메고 카페에 갔다. 문제는, 코로나 19가 잠식한 시기부터였다.

사람마다 크레이프를 먹는 방식이 다르듯, 시간의 층위를 구성하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생산성을 위해 공간이동을 선호한 이유

외출이 어려워졌다. 안 나간다고는 말 못 하겠고, 이틀에 한 번이 사흘에 한 번 꼴이 되었다. 재택근무도 늘었다고 하는데, 전 직장에서 이를 1달간 경험한 사람으로서는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70년대 포드가 정립한 ‘8시간 근무’라는 틀을 고수한 채 공간만 집으로 옮기는 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스펙 불일치를 떠오르게 했다.

집안에서도 좌표마다 최적화된 행동이 다르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하지만 취업 준비가 길어지는 만큼 의지는 나약해졌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타이핑을 하다 잠들었고, 식탁에서는 아점을 먹으며 유튜브를 봤다. 반나절은 금방 지나갔다. 열 발자국만 가면 포근한 이불속에서 뒹굴 수 있는 집에서는 아웃풋을 내기 쉽지 않았다. 모든 사물이 정겨운 거리에 있었다. 치명적이게도.

집에 피아노가 있어도 연습실을 등록했다. 발레 연습실에서는 몸의 근육에 집중했고, 1평 남짓한 연습실에서는 건반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그 흔한 어학 강좌도 온라인으로 듣지 않았다. 웬만한 운동, 웬만한 학습 모두 오프라인을 선호했던 이유다. 특정 행위에 특화된 공간이 ‘준비된 자세로’ 맞아줬기 때문이다. 반면 집은 ‘아늑한 휴식’에 알맞은 공간으로, 모든 행위를 해내기엔 질서가 묘연했다. 괜히 스위트 홈이 아니었다.

마스크를 낀 채였지만, 발레를 갈 수 있던 시절이 그립다.


공간이동 대신 시간에 층위 만들기

집에 머무는 건 번거롭지도 않고 돈도 들지 않는다. 외출 채비를 하는 수고를 덜어주고, 카페에 체류값으로 지불하는 4천원을 아낀다. 잠옷 차림으로도 운동할 수 있다. 이 모두가 바로 ‘집’의 한계다. 제약이 없기 때문에 몰입이 어렵다. 그간 특정한 행위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부산을 떨었다. 지하철로 10분 거리의 카페를 찾았던 건 아웃풋을 만들려는 나만의 발악이었다. 이 같은 생활방식을 폐기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집에서도 시간을 밀도 있게 보내는 방법은 없을까. 유일하게 찾은 임시방편은 묘했다. 맘 편하게 즐길 콘텐츠를 특정 시간대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부부의 세계>와 <하트 시그널>에서 힌트를 얻었다. 막장 드라마와 어렸을 적 인터넷 소설을 보던 감성으로 빨려 들 듯 몰입했다. 쏟아지는 시청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톡방도 포인트였다. 중독성 강한 방송은 시간에 ‘고삐’를 메어줬다. 2시간만 참으면 ‘쀼의 세계’를 볼 수 있어! 라는 식이었다. 유희에 할당한 시간은 나머지 시간에 텐션을 높여줬다. 작지만 유의미한 발견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잠식한 지 8개월째에 접어든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무언가 해내려면 나약한 의지를 믿는 대신 번거롭게 몸을 움직여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표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고 실천해왔다. 코로나 19는 고수해 온 생활신조를 버리도록 강요한다. 생산성을 위한 셈법이 한층 복잡해지는 때, 마음도 한결 무거워진다.


코로나는 코로나 이전의 기억을 지우라고만 하는 것 같다. 카페에서 상영 중이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해당 글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하기 이전에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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