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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Sep 19. 2020

좋아하는 마음은 코어 근육, 잘함은 근력이다

송아를 닮은 우리 모두에게

좋아해요, 와 좋은 사람이에요의 간극

손에 잡히지 않는 자기소개서를 들고 산책을 나갔다. 메모장을 들고 벤치에 앉아서 풍경을 들이켰다. 한숨 돌리는 찰나,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송충이였다. 그들의 서식지인 플라타너스 아래였으니 말 다했지. 각 잡고 생각 좀 하려고 했더니 뭐람. 일어나 걸었다. 이번 주 내내 지원서에 차도가 없었다. 직전에 쓴 곳이 정말 다니고 싶은 곳이라 생각해서인지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었다. 발걸음을 옮기며 녹음을 바라보다가 문득, ‘좋다’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깨달았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때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대개 그 말은 고백의 거절에 쓰인다. 객관적 좋음은 적당한 핑곗거리다.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인과관계가 없다. 외모와 성격, 스펙과 배경 모든 것을 통틀어도 객관적인 조건의 좋음은 당신의 마음이 좋아함으로 기울 수 있도록 개연성을 부여할지언정, 필연적이지 않다. 좋아함 자체는 씨앗 같은 것이다. 마음의 씨앗.

일주일 가까이 새로이 입사를 지원하는 데 곤란을 겪은 내 마음을 돌아봤다. 경력직 이직이어도 나 이거 잘해, 라는 얘기로는 부족했다. 업계가 다른 만큼 해당분야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든 피력해야 했다. 깊은 관심이 없었으니 쓸 말이 마땅치 않았다. 당장 눈앞의 검색 몇 건으로 얻은 지식은 매력적인 자기소개서를 만드는 알맹이가 될 수 없었다. 꽤나 좋아하지 않고는 끌어낼 이야깃거리가 많지 않았다.

좋은 회사, 좋은 사람. 다 필요 없다. 사랑만큼 진로도  ‘좋아하다’라는 주관성이 먼저다. 좋아하는 마음은 주체가 드러나는 주장이다. 남들이 좋다는 객관성은 그저 근거로서만 기능할 수 있다.

나는 스콘을 좋아한다. 일단 좋다는 데 어쩔 거야.


좋아하는데 못하면, 아프다

발레를 한다. 취미반임에도 가장 열등생이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희박하기 때문에 괜찮다. 마른 비만 체형이라 근육은 없고, 허리는 굽어있다. 남들은 앉은 채로 허리를 숙여 몸 앞판을 바닥에 완전히 붙이는데, ㄴ자로 반듯이 앉는 것도 겨우 버틴다. 내 몸은 근육이 자랄 수 있는 토양 자체가 못 되는지 의심이 든다. 이 정도로 ‘좋아하는데 못할 수 있는지’ 놀랍다. 레오타드와 토슈즈를 챙겨 정겹게 학원을 향하는 경쾌한 발걸음과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해 부들거리는 내 몸 사이에는 거대한 협곡이 자리한다.

발레는 처음부터 끝까지 몸의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하는 예술이다. 글자 그대로의 물리적 긴장이다. 근육 전체를 빳빳하게 각성시켜야 한다. 한순간 방심하면 그새 호흡이 헐떡이고, 동작은 텐션이 다 늘어난 관절 인형처럼 멍청해진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근육과 관절의 관계다. 근육을 알맞게 쓰지 못하면, 동작을 따라가기 급급해 어깨 관절, 무릎 관절 등을 쓰면서 ‘흉내낸다’. 동작의 외형만 따라하면, <땀 한 방울> 안 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발레를 한다면, 이마부터 손끝까지 땀으로 흥건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취미여도, 여러 마음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저 즐기면 그만이라는 유희적 마음과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은 성장 욕구가 공존한다. 하지만 내게 발레는 순수하게 취미 20000%. 기대치가 없고, 능력치가 현저히 뒤떨어지기에 괴롭지 않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프로처럼 잘하고 싶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아가 핵심 능력이자 수입원이면 더더욱. 좋아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잘해야 한다. 잘하는 순간이 간헐적으로라도 찾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근육을 쓸 줄 몰라 잘못 쓴 관절처럼.

발레를 갈 때마다 즐겁지만, 제일 못하는 수강생이다.



재능 없는 이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인생의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많은 이들이 연비 면에서  잘하는 일을 업으로 선택한다. 사람들은 지갑을 여는데 참으로 엄격해서, 그저 그런 연주, 별로인 그림, 맛없는 베이커리에 지갑을 열지 않는다. 평가는 가혹하다. 제아무리 위로 에세이가 넘쳐도 이쪽이 현실이다. 누구나 소비자이고 누구나 공급자인 시장은 가장 엄정한 판사다. 최소한 질이 보장되지 않거나 색다른 가치를 주지 못하는 생산물에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한 장면이 유독 밟혔다. 바이올린을 좋아하니까,라고 말하는 송아의 맑은 눈망울과 꼴찌인 성적 탓에 협연을 함께 하지 못한 채 무대 바깥으로 밀려나던 서글픈 눈이 겹쳐졌다. 재단 일을 하면서 가까워진 피아니스트 박준영이 “재능은 없는 게 축복이죠”라는 말에 “재능이 없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꿈꾸는 재능이 제일 크다고, 꿈꾸고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거예요? 준영 씨가 재능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나 해요?”라고 토로한다.

재능이 있는 자들이 그 일을 지속하는 건 그저 ‘재능이 있다’라는 사실이 전부가 아니다. 재능을 갖춘 자는 어릴 때부터 ‘참 잘하네’라는 얘기를 귀에 먼지가 더께처럼 앉도록 듣는다. 음악이라면 콩쿠르, 미술이라면 공모전, 스포츠라면 대회 등 각종 경쟁에서 공인된 성적을 거둔다. 재능은 관심으로 돌아오고, 주변의 기대와 독려 속에 자극된 재능은 실력의 축적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실력은 사회적 인정으로 돌아온다. 이 선순환 구조에서 재능 있는 아이는 실력자로 성장한다.

재능 없고 못하는 사람이 슬픈 건 바로 이 선순환 플로우를 탈 수가 없다는 점이다. 송아가 이미 경영대를 졸업했음에도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묻는다.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바이올린에 재능은 있니? 낮은 전공 성적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그다음 루트를 탈 기회를 소진하거나 박탈당하는 것이 문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몰려오는 회의감이다.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족적인 노력만이 원동력인데, 이 노력이 능력으로 드러나려면 배로 힘이 든다. 결국 ‘이 일을 계속해도 될까’라는 의혹의 가장 확실한 피드백은 성과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중 바이올린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찬 송아의 눈빛
낮은 성적 탓에 연주에 함께 할 수 없었던 공연장을 바라보는 송아의 뒷모습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좋아할 수 있도록

어떤 회사는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좋아하는 만큼 할 말이 많았다. 발레는 이번 생에 기초반도 불가할지 모른다고 체념하면서 그저 좋아만 한다.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송아는 졸업 이후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행보를 정한다. 못해도 좋아하는 걸 해도 된다. 문제는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까지 할 수 있느냐>다. 언젠가는 ‘가까스로 해내는’ 수준에서 ‘꽤 잘하는 수준’으로 넘어가야 한다. 꽤 잘하기만 해도 누군가는 그를 찾아준다. 좋아하면 잘해야 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다. 어떤 일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인정은 필수적이니까.

좋아하는 주관성이 먼저고, 객관성은 근거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맞다. 주장이 나고 근거가 있다. 사랑과 진로의 공통점이 있다면, 주장이 선행된다는 점이다. 최소한 내게는 집안이 이렇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거나, 연봉이 세서 회사에 간다거나 하는 순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보니 집안이 좋고, 좋아하는 일인데 급여도 높다면 모를까. 진지하게 하기로 한 일이라면 언젠가는 남들이 보기에도 잘한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 같은 근거를 확보할수록 나의 주장-좋아함에 더 힘이 실릴 테니까.

좋아하는 마음은 코어 근육이고, 잘하는 건 근력이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작은 성과들은 필요하다. 좋아함을 지속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니까.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코어 근육이 상실되지 않으려면, 이를 단련시켜 줄 근력을 키우자. 더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좋아할 수 있도록.

잘하고 싶다.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혼자 힘으로 만든 세번째 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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