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유보하는 말하기의 미덕
픽션이라 다행, 혹은 그래서 더 무거운
실언을 했다. 가볍게 보면 가볍고, 무겁게 보면 한없이 무거웠다. 대개 ‘아, 그런 말을 왜 했을까’하는 후회는 타인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 이번엔 다르다. 오롯이 내 귓전에 맴돌면서 나를 괴롭혔다. 로즈에 관한 이야기다. 90년대생이면 아는 영화 <타이타닉>의 바로 그 로즈에 관한 이야기다.
동생과 영화 속 캐릭터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나는 최근 본 <타이타닉>을 떠올렸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청 자유를 부르짖는데, 내내 부모 아래서 곱게 자랐는데 뭘 하겠나 싶어.” 문장이 끝나자마자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할 때의 찝찝함이 올라왔다. 픽션 -때때로 실제 인물보다 스토리텔링이 잘된 픽션 속 캐릭터가 더 공감하기 쉽다는 측면에서-속 캐릭터의 심리조차 이해하지 못한 자신에 놀랐다. 아니, 그러니까 자유를 갈망하는 거잖아.
예쁘지? 그러게, 예쁘다.
이틀 연속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봤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리고 <도망친 여자>. 인물들의 말하기 방식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여기 정말 예쁘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진짜 복 받은 거 같아.” “그치, 참 예쁘지.” 따위의 말들. “언니 배고프겠다.” “아니야, 나 배 안 고파. 너야말로 배고프지?” “배고프면 언니가 더 배고프지.” 같은 말들. “아주 끔찍해요.” “끔찍해요?” “끔찍하죠.” “끔찍하네요.” 말장난처럼 이어지는, 어미만 변주되는 동어 반복. 종종 어색해 보이지만, 정서적으로 충만한 장면들. 별 내용은 없지만, 그만큼 감정이 목소리 톤과 표정에 따라 미풍에도 떨리는 이파리처럼 섬세하게 그려진다.
영화관을 나오고서도 인물들의 유순한 화법이 귓가에 찰랑거렸다. 섣불리 판단하고 내뱉었던 나의 말하기와 비교됐다. 한창 ‘논리적 말하기와 글쓰기’에 집중하던 때가 있었다. 여전히 그것은 내 테마다. 그러나 업무라면 몰라도, 사적으로는 인간적인 대화법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이란 주고받는 것이다. 적절한 속도로 대화가 오고가려면, 빽빽이 내용을 채우기보다 ‘흐름’을 눈여겨봐야 한다. 무엇보다, 단정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순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렇구나’의 마법
흔히 ‘그렇군’을 할 말 없게 만드는 말로 꼽는다. 확실히 그렇군, 은 마지막 받침 ㄴ이 입안으로 수렴되는 탓인지 단호하다. 그렇다면 말끝을 늘여 ‘그렇구나’의 마법에 몸을 실어보는 건 어떨까. 앞말을 받는 성격은 같아도 한층 나긋하다. 다음 말을 잇는 이의 긴장을 덜어주고, 모두에게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준다. 머리를 누이는 대로 느릿하게 파이는 메모리폼 베개를 닮은 말이다. 표정도 눈빛도 말간 빛을 띠면 좋겠다. 홍상수 영화 속 여자들에게 배운 덕목이다.
지난 주말, 친구에게 로즈에 관한 나의 발언을 성토했다. 픽션 속 캐릭터지만, 어쩜 그렇게 말했는지 스스로 의아해. 솔직히 영화가 너무 낭만적이라고 느낀 탓도 있다고 봐. 그래도 역시 심했지...? 변명도 덧붙였다. 사실 영화를 아직 다 안 봤어. 배가 침몰도 안 했거든. 친구가 물었다. 엔딩 기억 안 나? 아뿔싸. 기억났다. (10대 때 봤지만, 해마 세포에 거의 희미해진 장면이.) 자신의 이름을 ‘로즈 도슨’이라고 말하는 씬이. 친구에게 들은 배 침몰 이후 로즈의 삶은 그가 부르짖은 자유가 공상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영화를 끝까지 봤더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판단을 유보하는 말하기를 해야겠다고. 내가 물러선 만큼 타인이 제모습을 드러낼 여유를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한없이 적극적인 말하기를 하고 싶다고. 안타깝게도 나의 mbti 유형은 ‘네 말은 틀리고 내 말이 맞아’를 증명하고 싶어한다는 intp다. 심보가 못되도 너무 못됐다. 그나마 판단을 뜻하는 p 수치가 낮다는 점이 작은 위안이다. 함부로 넘겨짚지 않겠다. 게을러지고 싶다. 타인을 속단하지 않는 말하기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