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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Dec 13. 2020

당신이라는 촉각을 잃어버린 해

페이스 타임을 걸면 충분한 걸까요

마스크, 결여된 표정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다릅니다. 공포와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말할 때면 언제나 의견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은 귀신도, 연쇄살인범도 아닙니다. 제게 가장 무서운 건 <it>에 나오는 피에로의 얼굴이었습니다. 흥미롭게 보았던 <어스>에서도 공포감을 배가한 건 가면 같은 얼굴이었죠.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요. 저는 여전히 의중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마스크는 얼굴에서 표정을 앗아갔습니다. 마스크를 끼고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거나, 좀 더 깊은 소통을 해야 할 때면 상대방의 눈에 집중했습니다. 내용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였죠. 흘긋 본 얼굴과 목소리만으로 쉽게 이해되던 메시지들은 표정이 일부 제거됨으로써 한층 많은 집중력을 요구했습니다. 상대가 의견을 말할 때면 이마와 눈썹 근육을 움직여 “당신의 말에 적극 동의해요”라는 뜻을 전달했죠.

타인의 감정을 정확히 읽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배로 들었습니다. 일은 그저 내용만으로 이뤄진 지시와 논쟁이 아닙니다. 상사나 동료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감정 교환이 필요하죠. 시선만으로는 상대의 발언 취지를 읽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역으로 지하철에서 무례한 사람을 만나면 마스크 안으로 험한 말을 구시렁댔습니다.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여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 혼자 있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 있다


코로나는 다양한 종류의 감정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사교의 즐거움을 빼앗겼다는 분노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일회적인 즐거움을 넘어 살아가는 데 타인이 얼마나 필수 불가결한 존재인지 느끼게 했습니다. 친구와의 정기적인 만남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로서 만남 자체로 삶의 피드백이었습니다. 나라는 독방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창문 같은 존재였죠. 이후에는 바이러스를 피할 길이 묘연하다는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특정할 수 없는 전파 장소가 곧 불안의 원형이었죠.

출근할 때마다 합정역에서 코로나 포스터를 봅니다. “지금 혼자 있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타인의 얼굴은 그 자체로 위협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코로나는 서로에게 감염병을 확산시킬 수 있는 잠재적 위해자의 얼굴을 씌웠습니다. 가끔 안부를 묻는 친구, 곁에서 잠든 동생,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며 인사하는 직장 동료 모두가 상호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몇 주 전 가족 김장 모임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뉴스에 뒤따라 질병관리본부는 ‘가족과의 만남을 자제하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한 번 더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더는 연장할 수 없을 만큼 길어지고 있고, 범위도 넓어지고 있습니다. 정부 지침을 해석하면, 제게 만남이 허용된 인간은 한 손가락만큼 축소됩니다. 몇 해 전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조그마한 방을 떠올리니,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싱글 여성이었다면 정서가 훨씬 좋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신이라는 촉각을 잃어버린 세계


어제는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다리를 건너 한 분이 확진자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지난 1월 이래로 들은 5번째 확진 소식이었습니다. 순간 느낀 감정은 언론에 나온 확진자나 자가 격리자들이 말하듯 ‘내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병에 대한 고통이나 합병증에 대한 우려보다는 내가 잠재적 위해자가   있다는 공포였습니다. 게다가 눈앞의 연인을 더는 끌어안을  없다고 생각하니 상실감이 밀려왔습니다. 검사 대상자였던 분은 익일인 오늘 음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를 비롯한 건넛다리의 모든 이들은 걱정의 불을 꺼뜨릴 수 있었죠.

촉감을 다른 감각과 구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감각이 상호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을 쳐다볼 수 있지만, 촉감은 그렇지 않습니다. 1) 상대의 손등에  손을 얹는 , 단단하고 세게 안아주는 , 흐느끼는 이의 팔을 쓰다듬는 일은 얼기설기 구슬처럼  언어보다   위로가 되곤 합니다. 타인의 살결은 때로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촉각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편지에 써진 키스는 가야 할 곳에 도착하지 않고, 도중에서 유령들이 홀짝 마셔 버리고 만답니다. 이렇게 풍요한 음식으로 인해 유령들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지요. 인류는 그것을 느끼고 그에 투쟁하고 있읍니다.
인간들 사이의 이 유령적인 것을 가능한 한 제거해 버리고 자연스런 교제를, 영혼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인류는 기차와 자동차와 비행기를 발명해 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읍니다. 이는 추락 속에서 이루어진 발명임이 틀림없지요. 상대방은 그만큼 더 침착하고 강하니까요. 인류는 우편 이후로 전보와 전화와 무선전신을 발명해 냈지요. 유령들은 굶어 죽지 않겠지만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2)


카프카가 말하는 유령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수신인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한 마음이나 왜곡된 감정이 아닐지 추측할 뿐입니다. 그럼 당장이라도 페이스 타임을 걸어 상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유령의 개입 없이 정서를 교환할 수 있는 걸까요.

제가 스마트폰을 완전히 덮어둔 채 저 멀리 밀어두는 시간은 눈앞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연인과 사랑을 나눌 때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스마트폰과 보냅니다. 제아무리 마음을 울리는 글과 영상이라도 만질 수 있는 타인만큼 실감되는 사건은 없습니다. 당신이라는 촉각이 상실된 세계의 거대한 공백을 느낍니다. 자연의 법칙이 오로지 종족번식인 것처럼, 생명체로서의 제1법칙은 생존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금 ‘인간으로서’ 잃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합니다.


영화 <그녀(her)> (2013)









[인용 자료]
1)Laura Crucianelli,  “신체 접촉의 중요성(The need to touch)”, AEON, 2020년 10월 26일
https://aeon.co/essays/touch-is-a-language-we-cannot-afford-to-forget
2)프란츠 카프카, 『나의 사랑 나의 슬픔 밀레나여』, 이인웅 옮김, 우아당, 1987,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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