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태주의 생일을 추억하며
차라리 몰랐더라면
‘야동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제게는 떡볶이가 그렇습니다. 떡볶이를 맛본 최초의 기억까진 떠오르진 않지만, 어느 순간 떡볶이는 죽을 때까지 주기적으로 흡입할 수밖에 없는, 먹어야 하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어떤 음식으로도 대체 불가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극단화된 분류를 좋아합니다. 일상은 대개 극과 극 사이에 놓여있기에 극단적인 질문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개인의 성향을 드러내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맛을 아는 쪽’과 ‘맛을 모르는 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추석 연휴의 끄트머리,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았습니다. 몇 년 전 연주회까지 나갔던 모차르트의 악보를 꺼냈습니다. 건반 위에서 총총이 빛나는 음을 빚어내는 즐거움을 알려준 곡이었죠. 모데라토의 부담 없는 빠르기에 단정한 4분음표가 맞이했습니다. 익숙한 즐거움도 잠시, ‘도레도레’가 반복되는 16분 음표부터 엉키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음악적 표현을 고민하는데, 현실은 테크닉부터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처음 마주하는 곡이라면 건반을 더듬는 것조차 즐거웠겠지만, 제대로 된 연주를 해봤던 입장에서 형편없는 연주는 슬픔을 안겼습니다. 욕망은 밤하늘을 헤매고 있는데, 현실은 지상의 개미 위에 얹혀있는 꼴이었죠.
해를 보고 왔어
누군가에게 깊게 마음을 내어주고 다쳤을 때 생각합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랑의 환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소멸해도 좋겠다 싶은 치밀한 섹스를 경험한 이는 체액으로 적신 하얀 시트를 잊지 못합니다. 끝없는 이완과 절정이 이어지는 밤의 협곡을 여행한 이에게 그림자 하나 없는 사회의 대낮은 생기 없는 무료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어떤 이에게 오르가즘은 생애 단 한 번 목격한 개기일식처럼 지나갑니다. 때로는 깊게 절망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그와 자지 않았더라면.’
온라인 세계에서는 사람들의 욕망과 상실이 가감 없이 투영된 글을 심심치 않게 만납니다. 시트가 젖는다는 게 뭔지 모른다고. 혹은 전 애인과의 잠자리 이후 오르가즘에 올라본 적이 없다고. 혹자는 ‘댕댕이(멍멍이)’처럼 알아듣기 힘든 은어를 발명해 검색을 피하면서 연인을 매료시키는 밤의 테크닉을 전수합니다. 혹자는 음핵 오르가즘과 질 오르가즘의 차이를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마치 해를 정면으로 보고 온 사람이 해를 본 적 없는 이에게 그의 경이로움을 구술하는 느낌입니다.
당신이 태어난 날
지고의 오르가즘을 경험하되 영원한 갈증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과 죽을 때까지 오르가즘의 맛을 모르되 자족하는 삶 중 어느 쪽이 나을까요. 오르가즘에 무지한 이는 모르는 채로 행복할까요. 맛을 알되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쪽은 백지 상태로 돌아가길 바랄까요. 쾌락만으로도 섹스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연인과 한없이 점으로 수렴하는 듯한 감각은 체험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항구적인 목마름에 시달릴지언정 말이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태주를 떠올립니다. 욕망의 위험함보다 욕망의 맛에 먼저 눈뜬 그를요. 욕망은 생일조차 모르던 그에게 생일을 부여합니다. 뱀파이어인 상현은 혀끝을 깨물어 상처를 내고, 태주에게 입을 맞춥니다. 어느덧 태주가 양손으로 상현의 뺨을 부여잡은 채 그의 혀 뿌리가 뽑힐 듯 그의 피를 빨아들입니다. 상현이 완전히 다시 태어난 태주에게 첫 인사를 건넵니다. 해피 버스데이, 태주 씨.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생일은, 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