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최초로 접한 야한 무언가를 기억하시나요.
제겐 고야의 그림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 가 해당합니다. 이 그림이 훌륭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제 망막에 맺힌 모델의 몸이 흥분을 자아냈던 기억은 납니다. 해당 그림을 명화를 엮어 소개한 예술 책에서 만났는데요. 부모님이 집을 비우시면 책 2/3 지점에 있던 그림을 펼쳐보곤 했습니다. 흐릿한 기억에 따르면 두 그림은 책 한 페이지에 상하로 배치돼 있었습니다. 희한한 건, 머릿속에 유독 강렬하게 남은 쪽이 <옷 입은 마하>라는 겁니다.
<옷 벗은 마하>부터 묘사하자면, 가장 먼저 잘록한 허리에 시선이 갑니다. 이후 배(pear)를 빼닮은 배 언저리서 시선이 둥글게 머물다가, 체모의 자취를 따라 음모에 도달합니다. 끝으로 은은하게 빛나며 나란히 놓인 허벅지로 시선이 흐르죠. 좀 어색한 점이 있다면, 가슴입니다. 트리플 에이 컵인 제가 봐도 영 이상한 모양으로, 밥공기를 그대로 엎어놓은 듯 반구를 유지하고 있는 형태감입니다.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점은 시선입니다. 왼쪽 사선 아래로 놓인 몸을 훑을만하면 유난히 또렷하게 표현된 얼굴을 흘깃 쳐다보게 됩니다. 미소를 띠고 있긴 하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인간이 아닌 잘 구현된 마네킹의 얼굴을 보는 듯합니다. 대놓고 무심하게 관객을 바라보는 마네의 <올랭피아>와는 또 다르죠.
<옷 입은 마야>는 곱게 화장한 얼굴에 옷을 꼼꼼히 입고 있습니다. <옷 벗은 마야>가 전신 누드를 드러냈음에도 시선의 거북함 때문에 얼굴에 눈이 가는 반면, 이쪽은 오로지 몸을 향합니다. 모델의 기색은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상이랄 게 없는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뺨에는 절인 체리 같은 홍조가 번져 있고, 눈빛은 흐릿합니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건 팽창하는 가슴입니다. 마치 오븐에 넣은 빵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과정을 담은 듯 부피감이 느껴지죠. 허리를 지나면 음부 쪽으로 수렴하는 옷감이 들어옵니다. 옷은 영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허리를 감싼 핑크 리본을 보면 원피스 같은데, 다리 사이에 말려들어간 모양을 보면 품이 넓은 하렘팬츠 같습니다. 분명한 건 맨몸 위에 랩을 감싼 듯 천보다 살덩이가 먼저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는 각각 1800년, 1803년에 그려졌는데요. 그림의 주인인 스페인 재상 마누엘 데 고도이는 누드화를 모아둔 갤러리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초대해 <혼자 보기 아까운> 연작을 ‘공유했다고’ 하죠. 어두운 갤러리에서 불빛에 의지해 삼삼오오 그림 앞에 모인 풍경을 상상합니다. 귀엽다고 해야 할까, 애처롭다고 해야 할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반면 제게 최초로 ‘야한’ 감정을 일으킨 이 작품은 5단짜리 책꽂이에 얌전히 꽂혀 있었습니다. 아마 책등에는 ‘해설과 함께 보는 명화 몇 선’ 따위의 친절한 제목이 적혀 있었겠죠. 제게 그림 속 마하는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롯이 저 혼자 즐기는 쾌락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야하게 느껴지는 무언가는 여전히 나 홀로 감상하는 대상입니다.
멋지고 근사한 것을 보면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집니다. 야한 무언가도 그런가요? 그렇다고 하면 왜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왜 그렇지 않을까요. 같은 그림이지만 이렇게 감상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혼자서 보는 것과 여럿이서 보는 것. 하나의 그림을 둔 서로 다른 태도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