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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Dec 07. 2021

이상형에 대한 질문이 부질없는 이유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를 보세요

빅과 에이단의 결정적 차이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고 있습니다. 영화파인 저로서는 여러 시즌에 걸친 드라마를 다른 작품으로의 일탈 없이 출퇴근길에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경우죠. 이 시리즈의 매력 포인트는 정말 많지만, 오늘은 캐리 얘기를 해 보려 합니다. 여성들의 공감을 얻으면서도 공분을 사는 캐릭터, 캐리. 저 역시 캐리를 남일 대하듯 욕할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캐리의 두 연인인 빅과 에이단은 여러 면에서 매우 다릅니다. 다정한 에이단과 유머러스한 빅. 사랑을 잘 표현하는 에이단과 밀당을 잘하는 빅. 자신의 가족에게 캐리를 소개하는 에이단과 어머니와의 주일 미사에 한사코 캐리를 소개하지 않는 빅. 집 잃고 갈 곳 없게 된 캐리에게 기꺼이 자신의 아파트 옆집을 내어주고 벽을 허무는 에이단과 캐리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일조차 어렵게 느끼는 빅. 하지만 이렇게 나열한들 본질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한 마디로 정리 가능합니다.


바로 ‘길들임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라는 것을.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2 (2010) 스틸샷 중 에이든, @네이버영화




다정한 남자가 최고라고 공감이나 말든가


친구들은 말합니다. “다정한 남자가 최고야”라고. 하지만 정작 제가 끌렸던 남자들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물론 교제했던 남자들은 저를 사랑해 주기야 했습니다. 낭만도 넘쳤죠. 집에 가는 길이 쓸쓸할 때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며 나만의 가수가 되어줬고, 마사지를 받고 싶다는 말에 자신도 피곤한 저녁에 향긋한 오일을 사다가 전속 마사지사가 되어주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태생이 다정한 부류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빅이 이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빅도 자신만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캐리를 사랑했습니다. 길들임을 바라지 않는 남자였을 뿐이죠. 속세의 언어로 말하자면 ‘나쁜 남자’인 것입니다. 갖고 싶지만,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남자. 경작지의 풀을 뜯어먹는 초식동물과 호시탐탐 먹잇감에 촉을 세워야 하는 육식동물의 생리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빅 때문에 속을 앓았던 캐리 본인도 어느 정도는 그를 닮아있습니다. 극 중 캐리의 대사는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죠. 캐리는 빅의 인생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정작 에이든이 그녀의 삶에 침투하려는 행동에 숨 막혀합니다.


“난 뭐랄까, 연애할 때 항상 사냥을 즐겼어. 근데 이번 연애는… 노력도 필요치 않고 너무 순탄해. 그래서 무서워.”
“에이든은 내가 빅이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 그대로 행동해. 그러면 나는 빅처럼 행동한다고.”

-<섹스 앤 더 시티> 중


‘나쁜 남자’는 여러 콘텐츠에서 너무나 많이 소비돼 온 탓에 각자 이미지도 다를 텐데요. 논의가 빗나가지 않도록, 오늘 이 글 안에서는 나쁜 남자란 길들일 수 없는 야생동물, 그중에서도 육식동물이라고 정의하겠습니다. 한 손에 크레용을 움켜쥐고 상대의 도화지에 낙서할 준비가 돼 있으나, 제 스케치북은 뒤로 감춘 유형입니다. 상대의 그림에 점이라도 찍지 않으면 다행이죠.


그러니까,  ‘다정한 사람이 좋지라는 친구들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정작 타협을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남자들에 끌려왔던 겁니다. 자연히 상대에게 휘둘리는 연애를  수밖에 없었죠. “내가 그의 관심사인 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역사 유튜브를 찾아보는 것처럼, 그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번쯤은 봐주면 좋겠어라는 바람에 조금도  미치는 연애를 했던 까닭이 여기 있었습니다.




배려와 존중은 상극의 언어


물론 세상 모든 여자들이 저처럼 심보 고약한 남성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연애의 덕목으로 배려를 가장 먼저 꼽는 여자는 캐리 유형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들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상대에게 들어오라 손짓하는 에이든과를 원하죠. 배려의 아이콘인 이들은 양보의 미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퍼즐처럼 서로를 길들이길 기대하죠.


열심히 하던 소개팅 앱이 있습니다. 거기엔 ‘연애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묻는 질문이 있는데요. 열 명 중 여섯은 해당 질문에 ‘배려’라는 단어를 꼭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넷은 ‘존중’이라는 단어를 쓰곤 했죠. 여기서 전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배려와 존중이 상충하는 가치라는 것을요.


“존중할게”라는 말을 듣거나 해 본 적, 한 번쯤 있지 않나요. ‘존중’은 그 본래적 의미와 달리 언제나 너와 나의 선을 재확인할 때 쓰이곤 합니다. ‘나도 너한테 요구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내게 강요하지 마’라는 의도가 실려있죠. 반면 배려는 ‘내가 너를 신경 쓰는 만큼 너도 날 생각해주면 좋겠어’라는 마음이 배어납니다.


존중은 길들임을 바라지 않는 수컷이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자기 계발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많죠. 자기 확장에 대한 욕구가  만큼 영역 싸움에 특화된 테스토스테론의 향기가 짙게 느껴집니다. 언젠가 친구와 ‘박력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으나 언제나 어중간하게 그치곤 했는데, 이젠 자신 있게 설명할  있습니다. 테스토스테론을 내뿜는 마이 페이스 남자라고요.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2 (2010) 빅, @네이버영화




당신이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은 다르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소개팅 자리에 등장하는 단골 질문입니다. 연애에서 중시하는 것에 관한 질문과 일맥상통하죠. 이상형은 상대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가풍, 교육환경, 관심사 모두 비슷해도 선뜻 맘이 가지 않는다면, 이상형의 덫에 걸려든 겁니다. 많은 이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연애 상대를 물색할 때 이는 중요하죠.


원하는 것은 원초적 본능입니다. 유아기 때 스스로 서러운 이유를 깨닫기도 전에 엄마가 젖을 물리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는 내가 유려한 언어로 자신의 욕구를 설명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가슴을 내어주었습니다. 욕구는 팔다리도 못 가누는 시절부터 말이 부재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채워지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욕구는 생존에 가까운 기본적인 층위를 차지합니다. 허기와 추위에서의 안전함, 나아가 성적 욕구를 아우르죠.


반면 이상형은 세상의 언어를 체득하고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는 유아기 이후 형성됩니다. 이때 노출된 문화적 자원이 모여 한 개인의 가치관과 취향을 완성합니다. 당연히 모국어를 체득한 이후이니 우린 이상형을 말로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상형은 몸이 아닌 정신의 언어로 만들어지니까요. 곧, 우리는 상대가 원초적 본능을 채워줄 만한 대상인지 살핀 뒤 그와 나의 가치관이 비슷한지 살핍니다. 촉이 먼저 발동하고. 그다음이 정신이죠.





원해서 끌리는 건 순식간이지만,

좋은 점이 많아서 끌리려면 시간이 필요해


물론 이상형이 의미 없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제 욕구를 상대에게서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때야말로 이상형이 빛을 발할 때거든요. 유아기와 십 대 이후 본격적으로 쌓아 올린 나의 가치관과 문화적 코드에 부합하는지 따져보는 겁니다. 내 정신이 바라는 대상인지 말이죠.


‘대화가 잘 통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 좋겠어’라는 이상형에 대한 기대는 이제야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어차피 섹시한 데다가 경제력과 안정감을 주는 남자는 극소수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대부분 남녀는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호감을 배합해 자신만의 기준을 만듭니다. 원초적 본능과 학습된 선호를 적당히 버무린 결정으로 연애 상대를 고르죠.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시간입니다.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대인지, 이상형에 부합하는 상대인지 읽어내는 데 드는 시간이 다르거든요. 상대를 보는 순간 본능에는 불이 들어옵니다. 반면 좋음을 파악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치관과 취향이 오랜 시간 켜켜이 누적돼 형성된 것처럼요. 욕구를 충족해줄 대상에 끌리는 건 순간이지만, 이상형에 걸맞은 대상에 끌리는 건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래 두고 봐야 하죠.

<섹스 앤 더 시티> 에이단과 캐리의 모습, Fanpop @Pinterest


누구나 좋은 남자라고 말하지만

사귀고 싶은 건 다른 문제인 걸


<섹스 앤 더 시티>로 돌아오겠습니다. 빅은 캐리의 원초적 욕구를 채워주는 남자, 에이단은 캐리가 사회를 살면서 쌓아온 문화적 기대를 채워주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원초적 욕구를 말하는 데 인색합니다. 성욕, 경제적 안정감, 심리적 지지를 바란다고 하는 건 구시대적이죠. 누구나 에이단을 ‘좋은 남자’라 말합니다. 수많은 콘텐츠가 그를 바람직한 남성이라 지지하죠.


여기까지 읽었다면 롤로 토마시의 ‘설거지론’이 떠오를 겁니다. 그는 여성의 하이퍼 가미(hypergamy) 욕구에 입각해 연애와 결혼을 분석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여성은 남성성을 갖춘 남성을 원하고, 그를 통한 상승을 추구한다는 건데요. 남성성의 정의에 대해서는 모호함이 남지만, 앞서 정리했듯 자기가 최우선이고 길들임을 원치 않는, 테스토스테론의 기운이 선명한 남자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설거지론은 여성들이 알파 남성에게는 규칙을 무너뜨리고, 베타 남성에겐 규칙을 내세운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규칙은 무너진 적이 없습니다. 알파에겐 예외 조항이 붙을 뿐이죠. 다정함을 탑재한 섬세한 남자를 마다할 여성은 없습니다. 다만 교제하고 싶다는 욕구에 결정타가 아닐 뿐이죠. 삼겹살에 깻잎을  먹든 상추를  먹든 고급 야채를 곁들이든 쌈은 쌈일 뿐입니다. 일단 돼지고기를 준비하는 것이 우선이죠.

<섹스 앤 더 시티> 빅과 캐리의 모습, Odyssey @Pinterest




서서히 물들듯 끌릴 수 있다면


누가 봐도 좋은 남자가 옆에 있는데, 자꾸만 엉뚱한 전 남자 친구이나 썸남이 떠오른다면 오늘 말한 원초적 욕구와 학습된 취향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왜 헤어진 애인을 잊을 수 없는지, 지금의 썸에 진전이 없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문제를 해결하진 못하더라도, 혼란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유익할 거예요.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에서 제 모습이 오버랩돼 한 분석이 여기까지 왔네요. 여자를 위한 조언은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이건 누구 하나 기분 상하거나 좌절하라고 쓴 글이 아닙니다. 연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현실을 낱낱이 보는 눈을 길러주자는 취지에서 썼을 뿐이죠. 해결책은 없습니다. 본능은 생각보다 강력하고, 긴 인생만큼 취향도 소중하니까요.


그리고 분석이 무색하게도, 앞으로도 전 에로스의 노예일 겁니다.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여자 친구들에게는 없는 구석을 남성에게 좇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율이라도 조절해 보려고요. 한 번쯤은 취향과 가치관에 입각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N형의 사고방식에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다정한 남자를요. 살결의 허기만큼 제정신의 결핍도 깊으니까요.


당장 육체의 신호를 끌어내지 못할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덕목을 면면이 갖춘 이를 오래 본다면, 가랑비에  젖듯 그를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의 문화적 소양에 가려져 있던 테스토스테론의 향기도 느낄  있을 테고요. 그쯤 되면 색다른 시선으로 매번 나의 시야를 젖혀주는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거예요. 서서히, 물들듯 좋아하게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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