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린의 음악들
코가 가렵고. 괜히 창을 열었다 닫고. 반항심에 샌들을 신고. 슬며시 커피포트를 찾고. 고민들은 훌렁훌렁 머릿속을 굴러다니고. 복잡한 시월. 무작정 신나면 용서가 되던 여름의 선곡은 끝났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 딱 지금 듣고 싶은 노래는 좀처럼 나오지 않고. 다음 곡 버튼만 계속 다음 곡 다음 곡...
track 1. <그대의 우주>
사 년 전 겨울, 여행 중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거기엔 당장 산타가 나타나도 놀라지 않게 준비를 시켜주는 풍경들이 있다. 숙소 주인이 오래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눈이 징글하게 왔다.
유럽의 겨울이 이렇게 혹독할 줄 몰랐다. 발에 감각이 없길래 프라하에서 부랴부랴 산 어그부츠를 신었다. 눈은 신발에 스며서 녹았고, 걸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이 날씨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젤리 모양 발자국을 내며 따라다니는 고양이뿐이었다. 사람도, 할 일도 없어서, 고래고래 이 노래를 부르며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보니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언제라도 이 노래는 나를 적막하던 할슈타트의 호수에 데려다 놓는다. 머릿속까지 차가워지던 공기와 바람에 아린 귀, 푹푹 잠기던 발목이 생생하다.
질감이 만져지는 목소리는 흐릿한 노랫말을 읊는다.
그대의 우주 그대의 별
외로운 그 안의 나
그대의 단어 그대의 말
흐릿해져 가는 그 속의 나
살얼음 낀 쓸쓸함.
track 2. <찰나>
너의 세상에 감히 들어가도 될까
힘껏 너를 안고 입 맞춰도 될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 찰나의 시간이 소중하다
track 3. <바다가 되고 싶어요>
피아노뿐이던 이전 노래들과 달리 기타가 등장한다. 사각사각한 목소리가 기타에도 잘 달라붙는다.
노래의 시작. 밀려오는 기타 소리와 희미한 가사가 파도를 닮았다. ‘해가 안뜰지도 몰라’의 끝은 더위에 녹아 가볍다. 이전 노래들 같았으면 더 가늘고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어쩔 줄을 모르겠네'의 기타 반주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로 들린다.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면, 대답이 메아리친다.
정돈된 시어가 아닌 일상적인 말투라 그런지, 일기를 들춰본 느낌이다. 단정하던 사람이 잠옷을 입고 풀어진 모습을 본 것 같다. 정제된 소금 같던 노래들이 두둥실 바다 위에 뜬 튜브가 된다.
해가 지는 해변에서 여름을 추억해본다. 겨울도 바다도 노을도 당신도 좋다. ‘감히 들어가도’ 되냐던 조심스러움은 사라지고, ‘아 일단 누워’ 보란다.
사실 바다는 너무 많이 쓰여서 바랜 오브제다. 나에게 바다는 무섭고 외로운 곳이다. 바다가 뭐 길래 되고 싶기까지 할까.
싫은 여름에도 기꺼이 머무르게 하는 사람.
믿지 않을 것도 믿게 되는 사랑.
퐁당 빠지는 찰나.
그런 모양의 바다가 되고 싶어요.
끊임없이 자신만의 모스부호를 찍어 우주로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로 향할지, 이렇게 녹아버릴지 불안해하면서도 ‘내일이 없는 듯이’ 꾸준히 나아간다.
‘별빛 한 줌 없이도 눈부'신 모습들. 그런 반짝임에 이끌려 ‘어쩔 줄을 모르겠’다. 미간을 난도질하는 그들의 부스러기가 한 톨의 연료가 된다.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젊은 뮤지션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어 감사하다. 지금 할 수 있는 말들을 써야 하고 불러야 한다. 나는 그저 기꺼이 들을 뿐이다. 배가 불러서 내일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내 음악에 대한 불안과 고민이 날로 커져가는 이 시점에, 저는 이것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무한히 반복될 앞날에 대한 걱정보다는 저는 그저 지금의 미성숙한 나에 대해, 지금의 불완전한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_이예린 순간 앨범 텀블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