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과 김순기의 게으른 구름
추워지니 2019년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올해의 작가 전시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올해의 작가상은 미술관을 어려워하는 주변 지인들에게 편하게 추천하곤 하는 전시다. 다양한 장르의 동시대 작가들을 만날 수 있고, 매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어서 권한다. 추천만 해놓고 안 가는 건 어쩐지 찔리는 기분이기도 했고, 춥지 않은 날씨가 아까운 탓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두 전시를 보고 왔다.
12학번인 나와 같이 시작한 올해의 작가 전시는 거의 매년 봐왔다. 올해는 특히 난민과 국경, 시스템과 소외, 가상세계와 같은 키워드로 묶인 특별전 같이 느껴질 정도로 비슷한 분위기의 작가들이 뽑혔다. 시스템에 대한 상상력을 풀어놓는 작품이 많아서 그런지, 차별되는 요소라기보다 거의 캡션 역할을 할 만큼 영상물이 많았다. 그리고 완성도보다는 아이디어나 생각을 풀어나가는 점에 중점을 둔 듯했다.
‘서던 리치’
전시를 가는 길에 친구가 요새 초등학교에는 스포츠 vr 교실이 따로 있다는 얘기를 했다. 듣고 놀랐던 게 머쓱할 정도로 펼쳐진 가상의 세계가 있었다. 스카이프로 면접을 보고, ai가 내 인성을 판단하는 시대, 그 너머의 시간들을 볼 수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말하길 반에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현실과 게임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 친구들이 뜀틀을 뛰다가 넘어지면 손으로 게임하는 동작을 하다가 ‘어 목숨 하나가 날아갔네.’라고 말하고, 툭 치거나 안아주면 그제야 현실세계로 돌아온다고 했다. 인터넷이 생긴 이래로 있어왔던 증상이자 걱정이지만, 어른인 나조차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데, 앞으로는 어떤 식의 사고방식이 다수가 되어 올바른 것이 될지, 이 작품들 앞에서 궁금해졌다.
키치한 분위기에 웃음 코드가 있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풍자가 그렇듯 쓴웃음들이 나왔다. 박혜수 작가는 우리라는 범위에 대한 설문조사부터 시작해 이야기의 당위들을 쌓아나가서, 더 빨리 설득됐다. 진지하지만 뭔가 서늘한 주식회사 퍼펙트 패밀리의 광고물은 이미 어느 정도 현실이라는 점에서 반은 다큐다. 사과도 대신해주고, 가족도 되어주고, 친구도 되어주는 회사로, 이미 존재하는 사직서 써주기, 하객 알바가 업무다. 다른 작품에서는 자살도 대신해주고, 그것마저 가상세계 속에서 벌어진다. 어디까지 우리고 왜 존재하며, 그걸 지키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위선의 무게를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잘 만들어진 너를 기억해 친구도 살 수 있어
창문을 열 수만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어
난 이제 기억에 스티커를 붙여
기리보이_도쿄
여기에 걸리지 않은 좋은 작품들이 아주 많았겠으나, 몇 명의 의견으로 좋다고 뽑힌 네 명의 작가다(올해는 4명 다 여자 작가다). 올해를 대표한다고 뽑혔는데, 그리고 국립인데, 상금이 너무 짜다. 작품 만드는 비용이 몇 배는 더 들었겠네 싶다. 사랑을 지속하는 데엔 지구력만 필요한 게 아니구나 싶어 졸업한 미대생들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자주 열리지 않는 우리나라 작가의 개인전도 있었다. 주로 프랑스에 활동한 김순기 작가의 회고전이다. 국내 미술사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 작가에 대해 다룬 점에서 의미가 깊다. 좋았고 마음에 깊게 남았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왔으면 싶어, 시시한 의견을 보태본다.
한쪽에서는 김순기를 여자 백남준이라고 소개하지만, 작가는 백남준의 영향으로 비디오 아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펼쳐나가던 중 존 케이지의 소개로 백남준을 알게 되었고, 같이 퍼포먼스를 해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류작가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반가운 요즘, 여기 여자 백남준이 아닌 김순기가 있다.
개인전에 주로 걸리는 단색화나 추상화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이 남긴 오랜 발자취들을 같이 밟아 볼 수 있었다. 비디오, 사진, 서예와 영상, 설치작품과 최신 작품에서는 로봇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들을 묶는 제목인 ‘게으른 구름’은 작가가 쓴 시로, 무용이야말로 유용하다는 태도를 요약한다. 장자의 철학도 맛볼 수 있고, 버트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곁들일 수 있다. 러셀은 자본주의라는 노예 제도 속에서 강조되어온 노동을 비판한다. 자신이 쓸모 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나날들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오히려 가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주제는 작가의 사진에서도 잘 드러난다. 바늘구멍 카메라로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은 발걸음을 오래 머물게 했다. 장난감과 같은 카메라로 오랜 시간 노출해 찍은 장면들은 어느 일상의 모습이다. 작업실 책상, 저녁 식사, 정원의 들꽃들.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미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었다. 식물을 가까이하고, 작업에 자연이 함께한다는 점에서 헤세의 에세이, 한병철의 <땅의 예찬>과 같은 책도 떠올랐다. 초록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에겐 비슷한 향기가 난다.
파리 근처에서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시골에 내려와 사는 나의 모습과도 맞닿아있다. 사진을 취미로 가진 지 2년 정도 된 터라 그것 또한 반가웠다. 원래 호감은 공통점을 찾으며 시작된다. 내가 기록하고 담아내려고 하는 것들도 특별한 것이 없다.
여행이나 특별한 산책길에도 카메라를 꼭 챙기곤 하지만, 매일 보내는 것 속에 답이 있다고 믿기에 가장 찍지 않을 순간들을 담고 싶었다. 잘 내리 쐰 햇살이 거실에 드리우는 각도를, 피었다 시드는 백일홍을, 추워질수록 털이 찌는 고양이들을 찍었다.
_ 열두 달의 취미, 열세 달의 습관( https://brunch.co.kr/@chocowasun/65)
삶과 철학, 그리고 작품까지 일치하는 사람이 있을까. 척하지 않아야 한다. 그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한다. 멋진 사람들은 그래서 드물다. 건강한 우주를 위해서는 일상을 가꾸는 바보들이 많아져야 한다.
바보라는 단어는 이미 바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가 바보라고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물론 신나진 않는다) ‘바보야’라는 말의 성분은 바보보단 우직함과 올곧음, 숨기지 못하는 지나친 솔직함 같은 함량이 더 높다. <바보 서예>의 손 가는 대로 흥얼거린 글씨들을 보면 그게 느껴진다. 순수한 놀이, 깊게 낮추지 않은 눈높이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의미의 바보. 어떻게 해야 더 잘 포장하고 뻥 튀겨낼까 속고 속이는 요즘, 이런 기분이 반갑고, 산뜻했다. 전시장을 나가기 전 마지막 작품은 다 번져버린 게으른 구름이라는 글씨다. 나도 바보 서예를 해봐야겠다 생각했고 상상만으로 즐거워졌다. 새로운 걸 하고 싶게 만드는 마음이 소중해서 달력 사이에 잘 접어 데려왔다.
최영미 시인의 소설, <흉터와 무늬>에서 주인공이 말한다. “흉터가 무늬가 되도록 나는 사랑하고 싸웠다.” 상처 받고 사랑한 무늬들을 기꺼이 드러내 준 다섯 작가들을 볼 수 있어 삐그덕 삐그덕 이 가을을 잘 닫는다. 내년의 벽을 잘 부탁하며 달력을 걸어둬야겠다.